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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02 17:46 수정 : 2006.03.03 16:04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백장미 저항운동 조피 숄
‘독일의 잔다르크’로 묘사 국민통합 도구화
여성 순결성 찬양 남성중심주의 투영
기독교계 시민만 강조 나머지 타자화
반나치 운동, 배타적 자기중심주의로 변질될라
배타적 자기중심주의로 귀결될 수도

심야통신/백장미의 기도(속)

앞 글에서는 <백장미의 기도>라는 영화를 소개했다. 이번 글은 그 속편 같은 것이다.

2월 초 어느날 나는 도쿄에서 백장미 저항운동의 산증인인 프란츠 뮐러씨를 인터뷰했다. 1987년에 ‘백장미의 뜻을 이어간다’는 목적을 내건 ‘백장미 재단’을 설립해 그 이사장이 된 인물이다. 나치 시대에 그는 울름시 고교생이었는데, 그런 활동을 떠받쳐준 것은 가톨릭 신앙이었다. 훌륭한 신부들이 올바른 정보를 주었다고 한다. 친구들과 철학이나 문학을 논하고, 나치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가톨릭 교회에서 비밀회합을 했다. <백장미 통신>을 우송하기 위한 봉투와 우표를 사서 수신자 이름을 쓰는 일을 떠맡았다. 나치의 민족재판소에서 금고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살아서 종전을 맞이할 수 있었다. 독일 패전을 전후해서 그때까지 나치스를 신봉하던 이웃 사람들이 찾아와 “내가 나치스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지금 82살이지만 뮐러씨의 사고는 명석하고 말투도 명료했다. 고교생이라는 아직 어린 나이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다수파로부터 고립당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저항운동에 가담했던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깊은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그러나 나는 약간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백장미의 기도>라는 영화를 보고 내가 느꼈던 위화감은 조피 숄이 너무 ‘성녀’로 묘사돼 있다는 점이었다. ‘독일의 잔다르크’라는 인상을 받았다. 프랑스 생활을 오래한 친구는 프랑스에서는 여당의 공화주의자들은 물론 르펜이 이끄는 극우파 국민전선까지도 ‘잔다르크’를 국민통합의 심볼로 이용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유관순을 ‘조선의 잔다르크’라고 흔히 얘기한다. 조피든 유관순이든 그들이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싸운 데 대해서는 크게 칭찬해 마땅하지만, 그것을 그들이 ‘여성’이라는 사실과 과도하게 엮어 세우는 일은 어떻게 봐야 할까? “여성인데도 싸웠다”든가 “여성이니까 싸웠다”는 식의 말투는 오히려 그들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어느 민족을 ‘순수한 소녀’에 비유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순수한데도 당했다”는 말은 “순수하지 않은 자는 당해도 싸다”는 심리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여성한테 ‘순결’을 요구하는 남성 중심주의가 투영돼 있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은 종종 ‘병합(한일강제합병)’을 ‘결혼’에 비유했다. 당시의 신문에 수염을 기른 일본인 남성이 치마 저고리 차림의 조선여성과 함께 관청에 혼인신고를 하러 가는 만화가 실려 있다. 관청의 접수인은 백인여성이다. 이 만화는 남성인 일본인이 일가의 주인이 돼서 여성인 조선인을 지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국제사회(즉 백인 제국주의 나라들)가 알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 만화에 우리 조선민족은 혐오와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 혐오감이 정당한 것이라고 한다면 유관순을 ‘조선의 잔다르크’에 비유하는 것도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정치권력을 쥔 남성들이 ‘여성의 순결성’이나 ‘여성의 용감성’을 극구 찬양하면서 그것을 민족이나 국가 이미지와 겹쳐 놓고 연설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속아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다.

이 영화의 수용 컨텍스트도 신경에 거슬린다. 두말할 것 없이 반나치 저항운동은 기독교계의 시민만 한 것은 아니다. 공산당계, 사회민주당계의 저항운동이 철저하게 탄압당한 뒤 ‘백장미’와 같은 비좌익 저항운동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전후의 독일은 동서로 분단돼 공산당계 인사들은 대부분 동독으로 넘어갔다. 서독은 아데나워 정권하에서 친미반공 정책을 폈고, 미국이 주도한 냉전정책이 나치 범죄자 추궁과 과거청산 작업을 무디게 만들었다. 1960년대까지는 아직 사회 각층에 나치에 협력한 전력을 가진 자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그런 시절인 1955년에 잉게 숄의 책이 출판돼 ‘백장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 데는 일정한 진보적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동서독일이 통일된 지금은 어떤가? 이 영화가 적극적인 사회비판이라는 의의를 상실하고 ‘독일국민’ 또는 ‘EU시민’이라는 내셔널 아이덴티티 형성과 국민통합에 효자노릇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이 영화 팸플릿에는 마르크 로테문트 감독 인터뷰가 실려 있다. 1968년생의 이 젊은 감독은 시민적 저항의 의의를 강조하면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장갑차에 깔려 죽는다는 각오 아래 항의하기 위해 거리 시위에 나선 것은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나치가 독일민족을 위한 ‘동방생존권’이라고 규정한 곳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에게 만주가 갖는 의미에 비유할 수도 있고, 독일인으로선 자국의 전쟁범죄와 연관시켜 생각해봐야 할 장소다. 또 지금은 석유지배를 둘러싼 세계전략이나 ‘9·11’ 이후의 군사전략과도 깊이 관련돼, 미국이 개입해서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시민 개개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순수하겠지만, 세계의 현실은 복잡해서 조심하지 않으면 시민의 순수성은 손쉽게 권력에 이용당하게 된다. 이 감독은 그런 측면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감독은 또 “이슬람교 광신자들을 상대로 맞서 싸우려는 이슬람교도가 더욱 많아지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이슬람교도가 맞서서 저항해야 할 상대는 ‘이슬람교 광신자’지 미국과 영국 점령군이 아니라는 얘기다.


부시정권으로서는 고마운 일일 것이다.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점령군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점령군쪽이 ‘광신자’로 낙인찍고 있다는 것이다. ‘백장미’의 조피 숄도 당시의 나치 권력 입장에선 ‘광신자’였다. 백장미 저항운동을 ‘성녀 전설’로 만들고 그것에 대한 정신적 동일화를 꾀함으로써 ‘유럽인으로서의 자기’를 긍정한다. 그리고 그 외부를 ‘광신자’로 낙인찍어 ‘타자화’한다. 그런 감각은 현재의 이민 배척 움직임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반나치 저항운동의 아름다운 경험이 추악한 배타적 자기중심주의로 귀결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거듭 얘기하지만, 이 영화는 볼만한 가치가 있으나, 그것을 보는 우리의 지성이 시험대에 오른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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