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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02 17:50 수정 : 2006.03.03 16:05

역사로 보는 한주

1946년 3월5일,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윈스턴 처칠 전 영국총리는 미주리주 풀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연설했다.

“발트해의 슈테틴에서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까지 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이 쳐졌다. 중부와 동부 유럽 고대국가의 모든 수도들이 그 선 너머에 자리잡고 있다. 바르샤바, 베를린,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부쿠레슈티, 그리고 소피아. 이 모든 이름난 도시들과 그 인근 주민들이 내가 말하는 소비에트 권역에 들어 있으며, 모두가 이런저런 형태로 소비에트의 영향 아래 있거나 모스크바로부터 고도의, 또는 점증하는 통제를 받고 있다.”

슈테틴은 폴란드와 독일간 오데르-나이세 선을 따라 설정된 새 국경 근처의 도시고, 트리에스테는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간 경계지역의 도시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 연합국으로 함께 독일과 일본에 맞서 싸웠던 소련과 서방은 종전과 더불어 제각기 다른 집을 짓기 시작해 이미 그때 서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철의 장막’이라는 말은 19세기 때부터 사용됐고 나치독일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도 패전 직전 그 말을 썼으나, 냉전이 본격화하면서 처칠표 ‘철의 장막’이 그 시대의 상징이 됐다. 물론 그것은 서방에서만 통용된, 사회주의권을 배제하고 타자화한 배타적인 분단선이기도 했다. 처칠은 그에 앞서 45년 5월과 6월 트루먼에게 보낸 전보에서 미국이 확보한 주요 노획물들을 소련이 야금야금 다 가져가고 있다며 그냥 두면 안된다고 단호한 대처를 촉구하면서 ‘철의 장막’이란 단어를 거듭 사용했다. 처칠은 미국이 소련의 팽창에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서유럽을 그대로 내버려둘까봐 노심초사했다. 루스벨트는 앞서 얄타회담 때 독일 패전 뒤 2년 안에 유럽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선언했었다.

하지만 괴벨스가 45년 2월25일 주간지 <다스 라이히>에 기고한 글은 ‘철의 장막’이 소련만이 아닌 서방도 함께 가담해 만든 합작품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독일국민들이 무기를 내려놓게 됐을 때, 루스벨트와 처칠 그리고 스탈린간의 합의에 따르면, 소련이 많은 독일 땅과 동부 및 동남부 유럽 모두를 점령하게 될 것이다. 소련이 통제하는 이 광대한 땅에 철의 장막이 쳐질 것이며 그 뒤에서 민족들이 학살당할 것이다.”

그 동아시아 버전은 중국을 빗댄 ‘죽의 장막’이었다. ‘철의 장막’은 도시지역에서는 장벽과 철조망으로 둘러친 성채처럼 거창했으나 시골지역은 단순한 쇠사슬로 모양새만 갖춘 곳도 있었다. 89년 난민 집결로 장막 붕괴가 시작된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이 그런 약한 고리였고, 동서 베를린 장벽과 함께 가장 삼엄하게 무장한 장막은 한반도 남북간 철책이었다. 냉전이 무너진 지 15년이 지났으나 이것만은 아직도 굳건히 버티고 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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