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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서스펜스의 거장
패트릭 맥길리건 지음. 윤철희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4만8000원. |
엄부시하 억압당했다? 통설 부정하고 행복한 소년기 부각
아버지 죽음·공습 겪으며 ‘삶의 서스펜스’ 눈떠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라는 극단적 평가 복원 시도
걸작 꼼꼼한 중계…추문도 일화로 녹여
영화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1899~1980)에 대한 책은 에릭 로메르와 끌로드 샤브롤의 연구서 <알프레드 히치콕>, 도널드 스포트가 쓴 전기 <히치콕>, 프랑수아 트뤼포가 히치콕 생전에 그와 나눈 인터뷰를 담은 <히치콕과의 대화> 등 국내에도 여러 편이 번역돼 나왔다. 영화인 전기와 영화 역사서를 써온 패트릭 맥길리건이 2003년에 쓴 <히치콕 - 서스펜스의 거장>은 한국에 번역된 히치콕 관련 서적 가운데 가장 두껍다. 분량이 무려 1376쪽에 이르는 이 전기는 무엇보다 히치콕과 그 주변 사람들, 그의 영화제작 과정에 대한 구체적 사실들이 풍부하다.
사실관계나 평가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들은 여러 견해들을 실으면서 성급히 결론짓지 않는 태도를 보이지만, 이 책은 전반적으로 “(히치콕을) 소름끼치는 익살꾼,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 포학한 예술가의 극단적인 사례로 본” 도널드 스포트의 <히치콕>의 해석으로부터 히치콕을 복원시키고자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히치콕의 어두운 면, 추문을 감추지 않는다. 추천사를 쓴 박찬욱 감독의 말처럼 “세상을 떠난 지 30년도 채 되지 않은 인물의 침실과 화장실까지 엿보는 듯한… 관음증적 쾌감”까지 주는 이 책은 “청과상의 아들인 키 작고 토실토실한 소년에서 영화의 진정한 기사로 스스로 날아오른 거물”을 주인공으로 한 세밀하고 흥미로운 드라마이기도 하다.
침실·화장실까지 엿보는 듯한 쾌감
히치콕이 ‘히치코키안’이 되기까지‘히치콕스럽다’는 뜻의 ‘히치코키안’이라는 형용사는 히치콕의 영화처럼 공포스럽고 서스펜스가 있다는 의미로 영화 관련 글에서 두루 쓰이고 있다. 그러면 히치콕을 ‘히치콕스럽게’ 만든 건 무엇일까. 이 책은 히치콕이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가톨릭계 학교를 다니면서 충동을 억압해 온 이면에서 범죄, 살인 같은 엽기적 상상을 해왔을 것으로 보는 이전의 몇몇 저서들과 견해를 달리 한다. 저자에 따르면 런던 근교에서 청과상을 했던 할아버지를 둔 히치콕의 집안은 가톨릭이면서도 엄격하기보다 모이면 술을 마시며 왁자지껄 떠들고 단체로 오페라나 연극을 보러가길 즐겼다. 그 분위기는 “디킨즈의 소설보다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에 더 가까왔다.” 히치콕은 “전반적으로 행복하고 안락한 소년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 사건이 자주 화제가 됐던 당시 런던 풍토의 영향 아래) 살인에 매료되는 문화를 경험한 감수성 예민한 청년”이었다. 히치콕은 13살에 학교를 자퇴하고 항해학교에 들어갔다가 다음 해 전기케이블 회사에 입사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런던대학 분교의 미술학과에 들어가 미술을 공부하면서 연극과 영화를 자주 보러 갔다. “연극을 보러 가서는 영화에 대해 생각했고 영화를 보러 가서는 연극에 대해 생각했다. … 히치콕은 영화는 거의 ‘반(反) 연극’이 돼야 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또 15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차 대전 당시 런던 공습의 공포를 경험한 히치콕은 “어린 나이에 이미 삶을 연약하고 덧없는 것으로 이해하게 됐다.” 1919년 그는 회사의 사보에 짧은 유머들을 쓰기 시작했는데, 책은 그중 8편의 전문을 소개하면서 이때부터 이미 ‘히치콕스러워’지기 시작했음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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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 <쾌락의 정원>(1926)에서 “액션”을 외치고 있는 히치콕(사진 위·손가락질하는 사람)과 <현기증>(1958)의 거실 장면을 촬영 중인 히치콕과 킴 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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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영화 시대에 영화의 자막작업을 하다가 영화사로 직장을 옮긴 히치콕은 26년 <쾌락의 정원>에서부터 감독을 맡지만 그 스스로는 “내 영화경력이 진정으로 시작된 작품이 <나는 비밀을 안다>(34년)”라고 말했다. 이 책은 히치콕의 중요 작품들의 제작 과정을 꼼꼼하게 중계하면서 어떤 아이디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한다. <나는…>에서는 히치콕 영화의 중요 장치인 ‘맥거핀’(관객의 추리를 헛다리 짚게 만드는 속임수)이 비중있게 등장한다. 책은 맥거핀의 배치가 히치콕의 머리에서 나왔는지, 시나리오 작가의 머리에서 나왔는지 정확하게 말하기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이건 항상 자신과 시나리오 작가 등 셋이 모여 영화의 구상을 다듬어가는 ‘히치콕 3인조’식 작업방식에 기인한다. 히치콕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현기증>(58년)의 반전 부분과 관련해서도 책은 자기 아이디어였다는 히치콕과, 그게 아니라는 작가의 말을 함께 실어놓고 있다. ‘관객 속임수’ ‘반전’ 장치 뒷얘기 금발머리 여자, 관음증
<쾌락의 정원>의 원작소설에선 주인공 남자가 범인인데, 당시의 꽃미남 스타 아이버 노벨르를 주연으로 캐스팅한 제작사는 노벨르를 악한으로 만들면 여성관객이 안 본다는 우려에서 범인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히치콕은 살해당하는 여자의 비중을 크게 늘렸다. 원작에선 금발인 이 여자의 머리를 ‘곱슬곱슬한 블론드’로 바꾸는 데 더해 모든 여자 희생자들을 ‘곱슬머리 블론드’로 바꿨다. 금발에 대한 그의 선호는 제작사의 영화외적인 간섭에 대한 대응책으로 시작됐지만, 히치콕은 여주인공의 섹슈얼리티를 중시했고 이를 위해 어디를 여행 가든 환락가를 관찰하기를 잊지 않았다. 책은 히치콕이 여배우에게 ‘작업’을 걸다가 딱지맞은 일화를 전한다. 히치콕은 <현기증>을 찍을 무렵 브리짓 어버를 집에 데려다 주면서 차 안에서 키스를 하려다가 세게 거절당했다. 어버의 증언. “내게는 엄청난 실망이었어요. 나는 그런일을 상상도 못했죠.… 가여운 추남이 경이로운 영혼의 소유자라는 것을 나는 알아요.” 그러나 영화를 찍을 땐 달랐다. <현기증> 촬영 중에 히치콕으로부터 ‘불필요한 표정을 없애라’는 지적을 따갑게 들었던 킴 노박은 그가 ‘나를 좋아한 적이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말년인 79년에 히치콕은 시나리오 작가 데이비드 프리먼에게 포르노에 가까운 성애 묘사를 구상하고 있음을 털어놓았다. 프리먼은 히치콕이 ‘최소한 인생의 말년에 얻으려고 기를 쓰는’ 디오니소스적인 쾌락을 키우고 있는 것같았다고 말했다. 그때 히치콕은 관절염, 고혈압, 심장질환에 시달리고 있었고 얼마 뒤 침대에 누워 ‘사실상 말라 죽어가다가’ 80년 4월 세상을 떠났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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