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3.16 20:17
수정 : 2006.03.17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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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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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라디오에서 전화인터뷰를 요청했다
10분인데도 통역을 안쓸 수 없는 난감함
형이 일본인에게 ‘모국어의 권리’를 주장했듯
난 동포들에게 ‘모어의 권리’를 양해 구했다
청취자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심야통신/모국어와 모어
나는 현재 서울에 머물고 있다. 3일 전 청주시 라디오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내 책 <디아스포라 기행>의 번역판이 돌베개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청주 방송국이 이 책을 ‘시민과 함께 읽는 이 달의 책’으로 뽑아 프로에서 연속적으로 다루기로 했단다. 그 첫 생방송 때 전화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민간 라디오 방송이 오후 프로에서 내 책과 같은 딱딱하고 무거운 책을 다룬다는 건 예상도 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 책에서 거론한 인물들 대다수는 고향의 공동체를 쫓겨나 자살한다. 주행중인 택시 운전수나 면도중인 이발소 주인이 듣기에 적절한 내용일지 의문이다. 일본에서는 라디오 프로가 책을 다루는 일은 거의 없다. 설사 다룬다 하더라도 예능인이나 스포츠 선수의 책, 또는 요리나 건강에 관한 실용서일 것이다.
내 책 같은 것을 다루는 일은 없다. 어쨌거나 고마운 일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어떤 말로 얘기를 주고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나는 어떻게든 ‘우리말’로 간단한 회화는 할 수 있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보지 않는 전화 인터뷰에서, 그것도 생방송이라면, 자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겨우 10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인터뷰에 통역을 붙이는 것도 너무 번거로운 일 아닌가.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일본어로 떠드는 데에는 저항감도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 고교생 때 “큰 소리로 일본어로 떠들지 마. 우리말을 할 수 없는 걸 부끄겁게 생각해”라고 형(서준식)은 주의를 주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본격적으로 우리말을 배울 기회도 없었던 내게 좀 심한 말이긴 했으나 합당한 주의였다. 당시는 식민지시대의 기억도 아직 생생하고 한일조약 교섭으로 일본쪽이 망언을 되풀이한 때였기 때문에 한국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재일동포 중에도 생각없이 일본어로 떠들면서 조국의 문화나 관습을 깔보는 듯한 태도를 지닌 자가 적지 않았다. 그런 인간들은 조국 사람들의 분노를 사 마땅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당시 내가 할 수 있었던 우리말은 “우리말 잘 못하므니다”와 “저는 서경식이므니다” 두 가지 정도밖에 없었다. 자기 성인 ‘서’의 음을 “소(SO)”로 발음하는 통에 “자네는 소(牛)인가”라며 친척들이 웃어 민망한 적도 있었다. 그런 기억이 40년 뒤 되살아났다.
실은 재작년 가을 돌베개 출판사로부터 <소년의 눈물>이라는 책을 냈을 때
(한국방송)의 ‘TV, 책을 말하다’라는 텔레비전 프로에 출연하게 돼 이번과 꼭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그 때는 질문은 통역 없이, 대답은 동시통역자가 하도록 하는 방법을 썼다.
나의 또 다른 형(서승)이 20년 가까운 감방생활을 마치고 일본에 돌아왔을 때 공항에 몰려나온 기자들은 모두 일본어로 질문을 던졌으나 형은 일체 우리말로만 대답했다. 기자 한 사람이 “당신은 일본에서 태어나 20살이 지나도록 일본에서 자랐는데 왜 일본어를 쓰지 않는가?”라고 묻자 형은 즉각 “모국어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기자들은 이해하지 못한 듯했으나 옆 자리에 있던 나는 형 주장의 정당성을 100% 이해했다. 일제는 일찌기 우리 민족의 독립을 부정하고 독립국가의 국어였던 우리말을 부정했다. 일제의 패배와 함께 우리 민족은 해방되고, 남북으로 분단됐지만 어쨌거나 독립국이 됐다. 그러나 일본 땅에서 계속 살아가게 된 우리 재일동포는 해방 뒤에도 민족교육의 권리를 억압당해 대다수가 우리말을 배울 기회도 없이 생활하고 있다. 이것은 해방 뒤에도 계속된 일제의 ‘모국어 권리’ 부정이고 식민지주의의 계속에 다름 아니다. 일본인 기자들에게 형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얘기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또한 에 출연했을 때 설령 더듬거릴지라도 질문에 우리말로 대답했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아직 실력부족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의 반도 생각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한국 시청자들에게 ‘모어의 권리’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게 하는 기회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어’는 ‘모국어’와는 다르다. ‘어머니한테서 모유와 함께 섭취한 말’ ‘사람에게 가장 근본적인 최초의 언어’이다. 대다수 재일동포들은 일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모어’는 일본어다. 자민족의 ‘모국어’를 억압한 자들의 언어를 ‘모유와 함께 섭취’해버린 것이다. 어떤 저명한 인도계의 사상가가 인도인한테 영어는 영국 식민지주의의 “강간에 의해 태어난 자식”이라고 비유했지만, 재일동포한테 일본어도 그와 유사하다. 나는 프로에서 굳이 일본어를 사용함으로써 같은 민족중에서도 다른 모어를 지닌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 여러 모어를 지닌 코리안 디아스포라들을 포함한 새롭고 유연한 ‘민족’의 틀을 구상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즉 형은 일본인을 향해 ‘모국어의 권리’를, 나는 조국의 동포들을 향해 ‘모어의 권리’를 주장했던 것이다.
청주 라디오방송국으로부터는 미리 질문항목들을 우송받아, 모두 6개 항목 질문 중 처음 2개는 직접 우리말로, 나머지 4개는 통역자를 통해 대답했다. 어정쩡(중도반단)했지만 이제부터 한국에서 생활을 시작하려는 내게는 그것이 정직한 방식인듯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게 잘한 것인지, 시청자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날 밤 머물고 있던 게스트하우스(초청자 객실)에서 목욕을 하려 하는데 욕조에 물을 채우는데 필요한 센(栓=마개)이 없었다. 샤워만 해도 괜찮았으나 추운 날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탕에 들어가 몸을 덮히고 싶었다. 어디 가서 센을 사올까, 하고 생각한 순간, 깜짝 놀랐다. 사려고 해도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게는 ‘마개’라는 어휘가 없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근처에 있던 천 조각을 뭉쳐 비닐로 싼 다음 욕조 배수구멍에 밀어넣어 막았다. 40년이 지나도록 나의 우리말 수준은 이 정도다. 조국 땅에서 자연스럽게 생활할 수 있게 될 날은 아직도 멀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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