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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16 20:35 수정 : 2006.03.17 16:38

장식과 범죄
아돌프 로스 지음, 현미정 옮김
소오건축 펴냄, 2만4000원

19세기말 미국 실용문물 체험관 아돌프 로스
조국 오스트리아 돌아와 신랄한 문화비평
“장식은 구시대 예술적 배설물의 징표이자 죄악”
예술과 생활의 평화로운 상생 강조
근대 건축관에 이정표 제시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일명 ‘화이트 시티’로 불리기도 하는 이 도시의 놀라운 변화는 철과 유리 등 새로운 건축재료를 사용한 고층건물의 탄생을 만방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페리스 휠이라는 자전거 바퀴를 닮은 전대미문의 초대형 놀이기구를 탄생시켰다. 이전 대회인 파리박람회가 선보인 에펠탑을 의식해 한층 업그레이드 된 미국의 자존심과 기술력을 드러내보이고자 한 의도된 기획물이었다.

20세기의 개막을 앞두고 불붙은 국가별 대항전 격의 박람회라는 도시이벤트는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을 흥분케 하는 것이었다. 콜럼버스의 신세계 발견 400주년을 축하하고 미국인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려고 마련된 바로 그 시카고 박람회 현장에 23살의 오스트리아 청년 아돌프 로스도 끼여 있었다. 공예학교와 미술대학을 거쳐 건축을 공부해온 그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바다 건너 신천지 미국을 보러 온 것이다. 이후 그는 시카고에서 허드렛일과 공사판 막일로 연명하며 3년에 걸쳐 미국의 진보적 건축을 체험하게 된다.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세기말 세기초의 전환기에 미국이 선택한 실용과 합리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정신에 감동한 로스는 조국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온다. 이미 그는 이전의 애송이가 아니었다.

미국의 근대성에 익숙해진 그에게 빈은 퇴행 일로의 도시였다. 그는 거침없이 문화비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비평은 당대의 허세와 위장을 겨냥한 포문이었다. 전시대의 봉건성을 탈피하고 근대정신에 뿌리내린 시민계급의 문화를 추구하는데 앞장선 로스는 사회전반에 걸쳐 굽히지 않는 저항정신으로 비판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적을 만들어냈다. 그가 글을 하나 기고하면 그 주장을 거부하는 투서들로 범벅이 되기 일쑤였다. 도대체 세기말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인가?

“문화수준 낮을수록 치장에 헤퍼”

당시 빈 사람들은 바깥세계의 변화에 대해 폐쇄적이었다. 심지어 선진화된 외국의 문화가 유입되면 곧 자신들의 문화가 손실을 입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또 과거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나폴레옹제국 시대 문화 유산들 가운데 누구나 좋다고 하는 것들을 고집했고, 그런 양식들을 모방하기를 일삼았다. 자연스럽게 그 시대 졸부 근성을 가진 사람들은 금은세공품 장식을 선호했다. 로스는 이런 풍조가 속물적 허식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갈파했다. 나아가 문화적으로 수준이 낮은 민족일수록 장식과 치장에 더 헤프다고 비유했다. 그는 인디언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모든 사물을 온통 장식으로 뒤덮는 인디어니즘을 극복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장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문화수준이 높은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장식은 지난시대의 예술적 배설물의 징표일 뿐이며 심지어 병적인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위 사진은 온갖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민 독일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 츠빙거궁(예담출판사(<세상을 바꾼 궁전> 중에서)이고, 아래 사진은 건물 표면에 장식을 극도로 억제하는 현대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한국의 아파트. 근대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 대중의 수준이 낮을수록 장식을 원하며, 장식만 강조하는 것은 범죄와 문신과의 관계와 같다고 저서 <장식과 범죄>에서 주장했다. 장식에 의존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물의 형태에 담긴 아름다움을 추구할 것을 역설한 그의 주장은 근대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훗날 근대 건축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그의 명언 “장식은 죄악이다”로 집약되는 로스의 세계관은 곧 그의 건축관으로 연결된다. 그는 건축의 진정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건축은 건물의 실제목적과 부합해야한다는 것, 재료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시대가 보유한 진보적 기술로 지을 것을 주문했다. 로스는 아름다움은 곧 그 시대의 양식으로 남을 수 있을 때 가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옛 정신 속에 현대적 형태를 담는 것을 부정했다. 대신 새 정신에 옛 형태를 적용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새 정신이라 함은 개성존중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에게서 현대정신인 즉 실용성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과 생활은 평화롭게 상생하는 구조라야 맞는다고 생각했다.

비평가로서 그의 태도 또한 눈여겨볼만한 것이었다. 그는 늘 타자의 입장에서 빈의 문화적 상황을 비판했다. 말인즉 의도적으로 빈에서 열리는 전시를 파리에서 열리는 전시를 보듯 평가했다. 국외자적인 그의 비판은 당연히 신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여전히 노동의 양에 좌우되는 시대였다. 건축도 노동시간을 더 많이 요구하는 재료들이 대우를 받던 시절이었다. 건축술의 영역에서도 힘의 본성이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다루기 힘든 재료로 지은 건물이 최고로 추앙받던 시기가 계속되었다. 그 시절 졸부들은 다이아몬드로 치장할 수 없는 것을 부끄러워했고, 모피를 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했으며, 석조 궁전에 살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대용품으로 만회하려고 했다. 건축에 모조품이 등장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당시 졸부 건축주들은 파사드(건물 정면에)에 많은 장식을 달아달라고 요구했고, 값이 싼 시멘트로 석조세공을 모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건축가들도 천박한 건축주들을 위해 그들의 예술을 매춘할 것을 강요당했던 시대였다. 예술가를 그냥 내버려둘 만큼 대범한 건축주를 만나는 행운은 소수만이 누릴 수 있었다.

“장식의 과잉으로부터 해방을”

<장식과 범죄>(소오건축 펴냄)는 100년 전 아르누보 시대 빈의 시대상황을 적나라하게 포착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의 맥락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건축의 현재형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런 이유로 아돌프 로스는 우리 건축가들에게조차 여전히 추앙되는 정신적 지주와 같다.

“자연에 과잉이란 없다.” 로스는 한 평생 이 한 마디의 명제를 계몽하기 위한 일생을 살다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인류를 장식의 과잉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인류는 언젠가 내게 감사할 것이라 믿는다.”

전진삼/건축비평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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