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3.23 19:09
수정 : 2006.03.24 14:28
역사로 보는 한주
1871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 역사상 첫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자치정부 ’파리 코뮌’(1871.3.18-5.28)이 수립됐다. 파리 코뮌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도 등장했으나 통상 보불(프러시아-프랑스)전쟁(1870.7.19-1871.5.10) 와중에 등장한, 사회주의 색채를 띤 이 두달여간의 민중정부를 가리킨다. 비록 단명했지만 파리 코뮌은 그 뒤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 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독일제국 통일을 주도한 프러시아 재상 비스마르크가 프러시아 국왕 빌헬름1세의 전보를 조작(엠스 전보사건)해 촉발된 보불전쟁은 1870년 7월19일 나폴레옹3세(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의 선전포고로 시작됐으나, 사태전개를 예측하고 대비해온 프러시아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됐다. 프랑스군은 연전연패했고 나폴레옹 3세마저 9월2일 세당전투에서 져 10만명의 장병과 함께 투항, 포로신세가 됐다. 격분한 파리시민은 9월4일 제2제정 종언과 나폴레옹3세 폐위를 선언했고, 제3공화정(1940년 나치 독일의 파리점령 때까지 지속)이 수립됐다. 전쟁은 계속됐으나 9월18일부터 파리는 포위당했다. 심각한 식량부족 상태속에 가진자와 못가진자간 양극화가 심화되고 대중의 불만은 고조됐으며 노동자들은 과격해져갔다. 1871년 1월28일 4개월간의 포위 속에 프랑스 정부는 결국 프러시아에 항복했다. 국민의회가 보르도에 소집돼 루이 아돌프 티에르를 수반으로 한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강화조약이 추진됐다.
우파와 지식계급을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은 강화를 주장했으나 노동자와 국민방위군은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결사항전 태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포위 6개월이 지난 3월18일 티에르는 정부군에게 수만명의 파리시민들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의 대포를 거두어들이도록 명령했으나 사기가 떨어져 있던 정부군은 오히려 국민방위군과 손을 잡았고 티에르는 베르사이유로 도망갔다. 3월26일 선거를 거쳐 28일 정식으로 파리 코뮌이 선포됐다. 92명의 코뮌 멤버들은 숙련노동자들과 일부 전문직업인들(의사, 언론인 등), 그리고 개량주의적 공화파에서 사회주의자, 자코뱅주의자에 이르는 다수의 정치활동가들로 구성됐다.
파리 코뮌은 단명했으나 그것이 끼친 역사적 파장은 컸다. 여성참정권을 실현했고 아동의 야간노동을 금지시켰으며, 정교분리, 징병제와 상비군제 폐지, 종교재산의 국유화, 이자 폐기, 노동자 최저생활보장, 관리봉급 상한, 공장주가 버린 공장의 노동조합 관리 등의 정책과 법령들을 공포했다.
독일군과 손잡은 정부군의 공세속에 5월28일 최종 진압당할 때까지 7일간의 시가전 ‘피의 1주일’ 등을 거치면서 3만여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으며, 망명한 활동가들에게까지 뻗친 탄압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거나 유형당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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