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단장인 임영진 교수는 "아무리 도굴이 되었다고 해도, 토기가 있었다면 그 파편이라도 남아있어야 정상인데, 그런 흔적은 도무지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임 교수는 안동고분은 도굴 시도 흔적은 있으나 도굴 피해를 보지않은 무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이곳 현지인들에 의하면, 안동고분은 40년 전쯤, 이 일대 해변이 매립될 때, 도굴이 되었으며, 그 때 토기와 함께 갑옷이 반출되었다고 하지만, 막상 이번에 조사를 해 본 결과 도굴 시도는 있었으나, 도굴은 성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임 교수는 "석실분 뚜껑을 열었을 때 석실 안은 두께 1.2m 가량 되는 흙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면서 "석실분 안이 도굴되었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임 교수는 애초에 이 안동고분에는 현지에서 제작된 토기가 전혀 부장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무령왕릉이라든가, 공주 수촌리에 이어 이번 고흥 안동고분 발굴 성과를 볼 때 4-6세기 백제 문화권의 '수장급' 무덤에는 현지 토기를 부장하지 않거나, 그렇다 해도 그 수량은 미미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한편 안동고분에서는 금동신발이라든가, 금동관모 외에 철제 갑옷 또한 시신에 착장한 상태가 아니라, 시신과는 별도로 석실 안에 안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즉, 동-서 방향을 장축(長軸)으로 삼고, 동벽 보다는 서벽이 많이 오므려진 평면 사다리꼴 형태인 이 석실에서 갑옷과 같은 철제품은 동벽에 몰려 있는 반면, 그 반대편 서쪽 벽에는 금동신발과 금동관모가 함께 발견됐다. 통상 시신에 이들이 착장된 상태였다고 하면, 신발과 관모(모자)는 서로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지만, 안동고분에서는 두 유물이 같은 위치에서 발견됐다. 한편 원래는 주 기능이 농기구이지만, 백제 문화권 무덤에서 더러 보이고 있는 살포(길이 180㎝)는 남쪽 벽에 기댄 채 발견됐으며, 동경은 석실 중앙 부근에서 수습됐다. 축조 시기에 대해 임영진 교수는 5세기 초반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했으나, 현장과 유물을 관람한 상당수 고고학자는 5세기 중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나아가 임 교수는 이 무덤 주인공이 마한이라는 정치체와 관련된다고 해석하고 있으나, 백제로 보아야 한다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한편 안동고분 출토 갑옷은 왜(倭) 혹은 가야적인 색채가 짙은 것으로 지적됨으로써, 한반도 남서부 해안의 고대 문화가 일본 열도와 밀접했다는 점을 새삼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한편 현장을 방문한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추후 발굴에 소요될 예산 등의 지원방향에 대해 "문화재청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면서 이들 금속 유물에 대한 보존처리를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에서 맡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번 안동고분은 호남지역 매장문화재 전문조사연구기관인 호남문화재연구원(원장 윤덕향)이 3천만원을 지원해 조사가 이뤄지게 됐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 (고흥=연합뉴스)
|
토기 없는 고흥 안동고분…금동신발과 금동관모가 한 자리에 |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기적적으로 백제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발굴되었을 때 이 고분에 대해 고고학계에서 가장 의문을 가진 대목 중 하나가 백제토기가 단 1점도 부장돼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물론 무덤, 특히 왕릉에 토기를 반드시 넣으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비슷한 시대 삼국시대 고분들은 거의 예외 없이 현지에서 제작한 토기를 다량으로 부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령왕릉 발굴은 지금까지도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다.
무령왕릉에 버금 가는 한성시대 백제 무덤군으로 밝혀진 공주 수촌리 고분군. 4-5세기에 축조됐다고 생각되는 이 무덤들에서는 백제 토기가 출토는 되었으나, 다른 고분에 비해서 토기 부장량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같은 백제 문화권인 무령왕릉이나 수촌리 고분군은 백제 토기 부장품이 아예 없거나 빈약하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것은 물론, 금동관과 금동신발 외에 중국에서 수입한 청자를 다량 부장하고 있다는 점 등의 공통점을 보이고있다.
최근 전남대박물관(관장 임영진)이 조사한 전남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안동고분' 또한 백제토기가 단 1점도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문을 증폭시키고 있다.
5세기 무렵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원형 석실분(石室墳)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동경(銅鏡), 환두도(環頭刀.둥근고리가 다린 칼), 살포(삽 비슷한 철제 기구) 등의 화려한 유물이 부장돼 있었다.
그렇지만 토기는 단 1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25일 현장 발굴설명회장을 찾은 많은 고고학자도 이에 대해 의구심을 표시하면서도, 이전에 도굴 피해를 보는 과정에서 토기가 반출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 안동고분에는 토기가 애초에 묻히지 않았다는 점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발굴단장인 임영진 교수는 "아무리 도굴이 되었다고 해도, 토기가 있었다면 그 파편이라도 남아있어야 정상인데, 그런 흔적은 도무지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임 교수는 안동고분은 도굴 시도 흔적은 있으나 도굴 피해를 보지않은 무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이곳 현지인들에 의하면, 안동고분은 40년 전쯤, 이 일대 해변이 매립될 때, 도굴이 되었으며, 그 때 토기와 함께 갑옷이 반출되었다고 하지만, 막상 이번에 조사를 해 본 결과 도굴 시도는 있었으나, 도굴은 성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임 교수는 "석실분 뚜껑을 열었을 때 석실 안은 두께 1.2m 가량 되는 흙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면서 "석실분 안이 도굴되었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임 교수는 애초에 이 안동고분에는 현지에서 제작된 토기가 전혀 부장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무령왕릉이라든가, 공주 수촌리에 이어 이번 고흥 안동고분 발굴 성과를 볼 때 4-6세기 백제 문화권의 '수장급' 무덤에는 현지 토기를 부장하지 않거나, 그렇다 해도 그 수량은 미미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한편 안동고분에서는 금동신발이라든가, 금동관모 외에 철제 갑옷 또한 시신에 착장한 상태가 아니라, 시신과는 별도로 석실 안에 안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즉, 동-서 방향을 장축(長軸)으로 삼고, 동벽 보다는 서벽이 많이 오므려진 평면 사다리꼴 형태인 이 석실에서 갑옷과 같은 철제품은 동벽에 몰려 있는 반면, 그 반대편 서쪽 벽에는 금동신발과 금동관모가 함께 발견됐다. 통상 시신에 이들이 착장된 상태였다고 하면, 신발과 관모(모자)는 서로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지만, 안동고분에서는 두 유물이 같은 위치에서 발견됐다. 한편 원래는 주 기능이 농기구이지만, 백제 문화권 무덤에서 더러 보이고 있는 살포(길이 180㎝)는 남쪽 벽에 기댄 채 발견됐으며, 동경은 석실 중앙 부근에서 수습됐다. 축조 시기에 대해 임영진 교수는 5세기 초반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했으나, 현장과 유물을 관람한 상당수 고고학자는 5세기 중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나아가 임 교수는 이 무덤 주인공이 마한이라는 정치체와 관련된다고 해석하고 있으나, 백제로 보아야 한다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한편 안동고분 출토 갑옷은 왜(倭) 혹은 가야적인 색채가 짙은 것으로 지적됨으로써, 한반도 남서부 해안의 고대 문화가 일본 열도와 밀접했다는 점을 새삼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한편 현장을 방문한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추후 발굴에 소요될 예산 등의 지원방향에 대해 "문화재청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면서 이들 금속 유물에 대한 보존처리를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에서 맡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번 안동고분은 호남지역 매장문화재 전문조사연구기관인 호남문화재연구원(원장 윤덕향)이 3천만원을 지원해 조사가 이뤄지게 됐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 (고흥=연합뉴스)
발굴단장인 임영진 교수는 "아무리 도굴이 되었다고 해도, 토기가 있었다면 그 파편이라도 남아있어야 정상인데, 그런 흔적은 도무지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임 교수는 안동고분은 도굴 시도 흔적은 있으나 도굴 피해를 보지않은 무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이곳 현지인들에 의하면, 안동고분은 40년 전쯤, 이 일대 해변이 매립될 때, 도굴이 되었으며, 그 때 토기와 함께 갑옷이 반출되었다고 하지만, 막상 이번에 조사를 해 본 결과 도굴 시도는 있었으나, 도굴은 성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임 교수는 "석실분 뚜껑을 열었을 때 석실 안은 두께 1.2m 가량 되는 흙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면서 "석실분 안이 도굴되었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임 교수는 애초에 이 안동고분에는 현지에서 제작된 토기가 전혀 부장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무령왕릉이라든가, 공주 수촌리에 이어 이번 고흥 안동고분 발굴 성과를 볼 때 4-6세기 백제 문화권의 '수장급' 무덤에는 현지 토기를 부장하지 않거나, 그렇다 해도 그 수량은 미미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한편 안동고분에서는 금동신발이라든가, 금동관모 외에 철제 갑옷 또한 시신에 착장한 상태가 아니라, 시신과는 별도로 석실 안에 안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즉, 동-서 방향을 장축(長軸)으로 삼고, 동벽 보다는 서벽이 많이 오므려진 평면 사다리꼴 형태인 이 석실에서 갑옷과 같은 철제품은 동벽에 몰려 있는 반면, 그 반대편 서쪽 벽에는 금동신발과 금동관모가 함께 발견됐다. 통상 시신에 이들이 착장된 상태였다고 하면, 신발과 관모(모자)는 서로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지만, 안동고분에서는 두 유물이 같은 위치에서 발견됐다. 한편 원래는 주 기능이 농기구이지만, 백제 문화권 무덤에서 더러 보이고 있는 살포(길이 180㎝)는 남쪽 벽에 기댄 채 발견됐으며, 동경은 석실 중앙 부근에서 수습됐다. 축조 시기에 대해 임영진 교수는 5세기 초반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했으나, 현장과 유물을 관람한 상당수 고고학자는 5세기 중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나아가 임 교수는 이 무덤 주인공이 마한이라는 정치체와 관련된다고 해석하고 있으나, 백제로 보아야 한다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한편 안동고분 출토 갑옷은 왜(倭) 혹은 가야적인 색채가 짙은 것으로 지적됨으로써, 한반도 남서부 해안의 고대 문화가 일본 열도와 밀접했다는 점을 새삼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한편 현장을 방문한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추후 발굴에 소요될 예산 등의 지원방향에 대해 "문화재청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면서 이들 금속 유물에 대한 보존처리를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에서 맡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번 안동고분은 호남지역 매장문화재 전문조사연구기관인 호남문화재연구원(원장 윤덕향)이 3천만원을 지원해 조사가 이뤄지게 됐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 (고흥=연합뉴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