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6.03.30 17:33 수정 : 2006.03.31 16:40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저는 ()월()일 이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아, 일본 대표 여성시인이 보내온 편지
그는 전후 ‘유토피아’를 그려왔고
옥중의 형과 나는 버틸 힘을 얻었다
‘어디엔가 아름다운 마을은 없을까’
꿈을 남기고 그는 갔다, 최후도 그이답게

심야통신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가 부친 편지가 왔다. 봉투를 뜯어 보닌 첫 행에 이렇게 씌어 있다.

“이번에 저는 (2006)년 (2)월(17)일, (지주막하출혈=뇌막졸중)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됐습니다.” 인쇄된 글이지만 ()속만은 손으로 쓴 글씨다. 2행에는 “이것은 생전에 써 둔 것입니다”라고 돼 있다.

그 분이 돌아가신 것은 2월20일 신문보도를 보고 알았다. 고령이었고 몸이 편찮으신 것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어쨌든 장례식 안내라도 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본인이 직접 쓴 편지가 온 것이다.

“내 의지로 장례·영결식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집도 당분간 사람이 살지 않게 되니 조위금이나 조화 등 아무것도 보내지 말아주세요. ‘그 사람도 떠났구나’하고 한순간, 단지 한순간 기억해주시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자신의 죽음이 가까운 것을 안 시인은 사전에 편지를 준비한 뒤 사후에 우인이나 지인들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해 두었던 것이다. 어쩐지 그답다고나 할까. 언제나 우뚝 서 있던 사람이 조용히, 깔끔하게 떠나갔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시인이다. 내가 그의 시를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의 첫 시집 <대화>(1955), 두번째 시집 <보이지 않는 배달부>(1958)는 이미 나와 있었으나, 세번째 시집 <진혼가>(1965)는 당시 아직 나와 있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13살 아이였지만, 그도 아직 30대로 ‘젊은이’라 해도 좋을 나이였다. 그런데 어쩌면 그토록 뚜렷한 존재감을 갖고 있었던 걸까.


‘장 폴 사르트르에게’ ‘6월’ ‘내가 가장 고왔을 때’… 못보던 신선한 과일을 손에 넣은 듯한 기쁨에 들떠 그의 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때 생각난 이미지는 불에 탄 기왓장들이 나뒹구는 거리를, 눈부신 오후 햇살을 온몸에 받으면서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걸어가는 여성의 모습이다. 봉건제의 속박과 군국주의의 중압에서 해방된 여성들이 주권재민, 평화주의, 남녀동등권 등 전후 일본 헌법이 구가한 민주주의 이념을 향유하면서 그것을 대담하게 실천해가는 모습이다.

그 무렵부터 오늘날까지 거의 40년간 그의 시를 계속 읽어왔다. 긴 세월 동안 내게 그는 멀리서 동경하는 대상이었을 뿐 서로 어떤 연락도 없었다. 그런데 1980년대 전반 어느날 뜻밖에도 당시 내가 살고 있던 교토에 그가 찾아와 직접 만나게 됐다. 그 경위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나의 형(서준식)도 또한 그의 시에 대해서는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는 17년간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250통 이상의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차례에 걸쳐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옥중서간집> 야간비행). 1982년 7월31일 소인이 찍힌 편지에서는 ‘6월’을 자신이 우리말로 번역해, “이것은 하나의 아름다운 ‘유토피아’다. 내 마음 속에는 이런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고 썼다. 82년이라면 군사정권 시대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시기였다. 형은 옥중생활 10년을 넘기고 출옥 전망도 전혀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 그가 그럼에도 자기 마음속에는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가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어디엔가 아름다운 마을은 없을까”로 시작하는 그 시 ‘6월’의 마지막 부분을 소개한다.

어디엔가 사람과 사람의 아름다운 힘 없을까

같은 시대를 더불어 살아가는

친근함과 재미, 그리고 분노가

날카로운 힘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형의 편지를 받아든 뒤 나는 당시 일면식도 없었던 이바라기 노리코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굳이 교토까지 찾아와 주셨던 것이다. 실제로 만나 본 그는 예상했던 대로 몸집이 크고 삽상한 사람이었다. 말하는 거나 동작 모두가 명쾌했으며, 여리거나 정서과잉인 듯한 구석은 전혀 없었다.

전후 일본의 여성시인 이바라기 노리코가 그려 보인 유토피아가 옥중의 형에게 버틸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스며있는 ‘일본’을 “알코올로 씻어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했던 형은 설령 일부분이었을지라도 그것이 자신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른 편지에서 나에게, 설사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가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거기서(즉 일본 시인들의 시적인 세계에서) 억지로라도 빠져나와 조선민족의 치열한 시적 세계에 몸을 던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것은 현실의 고통을 토대로 한 근거 있는 주장이고, 일본에서 계속 살아온 나를 근저에서 위협하는 문제제기였다. 지금도 나는 그 화두가 정당하다는 걸 인정하고 계속 그 해답을 찾고 있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80년대 후반부터 한글을 배워 조선민족의 시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윤동주를 소개한 그의 에세이는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수록돼 있다. 만년의 그는 일본사회의 우경화를 우려하면서 전후 민주주의 이념이 줄줄이 삭아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전후라는 시대의 빛을 함께 쬔 시인들(특히 남자들)이 현상 긍정적인 자세로 변절한데 대해 분개했다. 1999년 시집 <기대지 말고>는 분노의 시집이었다. 그 시처럼 그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홀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나는 지금 조용히 형에게 보고하고자 한다. -형, 형과 나에게 ‘유토피아’를 주었던 시인이 세상을 떠났어. 그 다운 최후였어. “어딘가에 아름다운 마을은 없을까”, 일본인들 대다수가 잊었든지 체념하고 있던 그 마을. 기억하고 있는 자들도 어색하게 냉소를 흘리며 얘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을.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건 얄궂은 일이겠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일지도 몰라.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광고

관련정보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