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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루언을 읽는다
김균·정연교 지음. 궁리 펴냄. 1만3000원 |
인류문명사, 커뮤니케이션 기술 관점에서 재구성
디지털 혁명 예감한 언론학 대가지만
일관성 없고 비약투성이 문체로 악명 높아
국내 학자 2명이 도전한 ‘맥루언은 옳은가’
적극적이고 과감한 주석 돋보여
“나는 접속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노동의 종말>로 유명한 미래학자 리프킨(Jeremy Rifkin)의 말이다. 그가 근대성을 상징하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패러디한 이유는 어쩌면 최첨단 디지털 기기와 초고속 케이블에 기초한 네트워크를 거론하지 않고 현대 문명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네트워크가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리프킨의 말처럼 현대가 “접속” 또는 “네트워크”의 시대라면, 전자 커뮤니케이션의 기원, 특징 및 영향에 대한 이해 없이 현대를 조망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에 토대를 둔 문명 이해의 효시로 멈포드(Lewis Mumford)와 이니스(Harold Innis)를 거명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이 분야의 실질적 선구자는 아무래도 맥루언(Marshall Mcluhan)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디지털 혁명이 시작되기 훨씬 전인 1960년대에 이미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특징을 간파하고 그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더 나아가 인류 문명사 전부를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였다. ‘정보사회’와 ‘지구촌’의 의미를 몸소 체험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맥루언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우리는 지금 디지털 혁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된 전자커뮤니케이션 환경은 개인들 상호 간의 관계를 크게 변형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조직들까지도 급속히 바꿔 놓고 있다. 사회과학적 담론의 주류가 이념에서 커뮤니케이션 구조 분석으로 옮겨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점을 놓고 볼 때 맥루언을 제외하고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에 기초한 현대사회와 문화의 이해를 논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맥루언은 사회와 문화의 성격이 그 사회의 주도적 매체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다. 그의 저술 대부분은 이 통찰을 뒷받침하기 위한 다양한 사례와 해석으로 채워져 있다. 그 안에는 매체의 본질과 영향력에 관한 빛나는 통찰들이 들어 있는 동시에, 세부적 내용에 있어 많은 비약과 단언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두고 여러 가지 상반된 평가가 제기되었다. 어떤 이는 그의 저술들에서 발견되는 해석상의 난점들이 맥루언의 전체 담론을 놓고 볼 때 치명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에 따를 경우 맥루언은 인류역사 혹은 문화 전체를 아우르는 거시적 문명 비평가이며, 따라서 미시적 차원의 설명적 한계는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러한 난점들을 들어 맥루언을 지적 사기꾼이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
담론 난해해 관련 저술 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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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셜 맥루언은 디지털 혁명이 시작되기 훨씬 전인 1960년대에 이미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특징을 간파하고 그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오늘날 디지털 혁명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인류 문명사를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맥루언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사진 궁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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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루언을 읽는다>(궁리 펴냄)는 이 물음에 대한 조심스런 화답처럼 보인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책은 ‘말이 되는’ 방식으로 맥루언을 이해해 보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그리고 그 시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전반부에서 저자들은 “매체가 메시지다”, ‘지구촌’, ‘핫미디어와 쿨미디어’ ‘지각 마비’ ‘감각비율’ 등 맥루언 사상의 주요 논지 및 키워드들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지각’ ‘사회변화’ 등 주요 주제와 관련해 맥루언 사상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제시하고자 노력한다. 맥루언이 일관성 없고 비약 투성이의 문체로 악명 높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간에 얼마나 많은 논의와 설전이 오고 갔을지 짐작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이 부분에서는 오독의 위험을 무릅쓴 적극적이고 대담한 주석들이 종종 발견되는데, 이는 올바름 여부를 떠나 맥루언의 대한 관심과 연구를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후반부에서 저자들은 ‘왜 맥루언은 그렇게 글을 써야 했을까’하는 물음을 제기하여 그에 답하고자 노력한다. 맥루언의 파격적인 글쓰기 방식은 일견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진지한 독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만다. 마침내 회의에 빠질지 모를 독자를 위해 저자들은 중세의 인문학 교육 과정인 ‘트리비움(Trivium)’에 대한 연구와 ‘신비평주의’와의 만남을 소개한다.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서 충분하진 않을지 모르나 이 부분은 맥루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맥루언의 학문적 생애를 되돌아보고, 그의 사상의 뿌리를 탐색하는 이 책의 후반부는 그의 글쓰기와 사상에 대한 자연스런 이해를 도모한다는 점에서 특히 맥루언에 입문하려는 독자들에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맥루언 연구의 보강이자 활성화 초석 저자들이 서문에서 술회하고 있듯이 이 책은 한 권의 완결된 주석이라기보다는 부족했던 국내에서의 맥루언 연구의 보강이며, 나아가 그에 대한 담론의 활성화를 위한 초석으로서의 성격이 짙다. 아직 일천한 맥루언 연구의 현실을 고려할 때, 책의 구성에 일관성이 결여되었거나 두 저자들의 전공의 차이에 따른 관점 및 논의 방식의 불일치가 눈에 띠는 등의 문제점들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줘야 할 것 같다. 원만희/성균관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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