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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06 16:19 수정 : 2006.04.07 14:03

안학수/아동문학가

어려운 부분 건성건성 ‘신앙심 깊은 나르치스가 타락한 골드문트 구하기’
어처구니 없는 독해 정독해보니 심오한 뜻이!

나는 이렇게 읽었다/헤르만 헤세 지음 <지와 사랑>

어떤 이가 내게 “글이란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고 재미나야지 너무 의미가 깊어 이해하기 어렵게 쓰는 건 작가 스스로를 과신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일리 있는 말이라고 여기는 독자들이 꽤 있을 듯하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틀려먹은 생각이라고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의 본뜻을 망각했거나 부정하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인스턴트식품에 맛들인 자가 요리사의 정성과 솜씨를 다한 영양 좋은 음식을 먹고 나서 함부로 투정하는 짓과 같았다. 같은 책을 여럿이 읽어도 사람마다 느낌과 이해의 범위가 다르고 또, 한 사람이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어도 때와 처지에 따라 그 느낌과 이해가 다르다. 여러 계층인 모든 독자들의 기호에 맞도록 글을 써야 된다는 주장은 괜한 생트집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어릴 땐 독서하기를 편식하듯 했었다. 좋은 책만을 골라 읽은 것이 아니라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는 부분만 가려내어 읽은 것이다. 중학교 졸업할 즈음 지인의 권유로 읽었던<지와 사랑>도 그랬다. 좋은 책이라니 지적 허영심으로 끝까지 읽기는 했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건너뛰거나 대충 읽었던 것이다. 그렇게 읽다 보니 그 내용에 담긴 의미도 엉터리로 이해했다.

단순하게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특별한 우정을 그린 작품 정도로 여겼고, 나르치스는 신앙의 힘으로 수도원 생활을 극복해낸 훌륭한 성직자로서 타락하여 살인까지 한 골드문트를 구제했다는 정도로 이해했다. 그 결과 한동안 그 나르치스란 인간상을 흠모하고 닮고싶어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독해였다. 지(知)를 추구하는 나르치스와 사랑(愛)을 추구하는 골드문트가 서로 부딪치며 혹은 갈망하며 일으키는 고뇌와 갈등의 부분들을 대충 넘겼으니 그 의미를 전혀 읽어내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성인이 되어 다시 자세히 읽어본 <지와 사랑>은 또 다른 <지와 사랑>이 있었나 할 정도로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저자인 헤르만 헤세는 자신이 목사의 아들로서 종교의 교리와 규제 속에서 자란 경험을 바탕으로 나르치스란 한 성직자를 그려냈고,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기숙사의 속박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주했던 경험으로는 골드문트를 세워 인간의 참모습을 그려냈다.

골드문트는 끊임없이 방랑하고 탐구하여 자아실현을 추구, 인생이란 균열과 모순을 통해야 비로소 풍부해지고 꽃피우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또한 그는 세상의 모든 대립들이 자연이자 인간 본원인 어머니 속에서 서로 합일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는 영생을 향한 정신만으로 자연에 대항하고 성당 안에 은둔하여 고행한 나르치스의 삶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헤세는 고행으로 그 정신을 이루어온 나르치스의 삶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두 사람을 우정으로 맺어놓고 서로를 지향하는 상반된 정신을, 보다 고차원적이고도 영원한 예술정신으로 끌어올려 더욱 격조 높은 가치를 이루게 했다.

나의 젊은 시절은 한 종교에 몰두하여 신권주의적인 선악 논리로만 세상을 보고 판단했었다. 또한 모든 것을 공식에 대입하듯 머리로만 따져 차갑게 결단하는 독선과 이기심으로 살았다. 그러한 내게 <지와 사랑>의 정독은 선악의 흑백논리와 냉정한 이기심을 버리고 가슴으로 느껴 따뜻하게 판단할 줄 아는 여유를 마련해주었다.


우리 사회엔 아직도 이념간의 괴리와 대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찌든 고정관념에 젖어 사는 이들이 많다. 그들에게 비록 고전이지만 다시 정독하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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