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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비엔나
칼 쇼르스케 지음. 김병화 옮김. 구운몽 펴냄 |
니체 이후 소용돌이로 빠진 유럽 문화
비엔나학파의 전방위 혁신이 가능했던 이유는
교양·종합예술 추구한 지식인들의 ‘다중인격’ 교류
지테는 바그너를, 츠바이크는 말러를 섬기며
건축에서 정치 거쳐 예술로 ‘드라마처럼’ 마무리
# 장면 1
프린스턴대학 칼 쇼르스케의 현대 유럽지성사 강의. 고급문화와 사회·정치적 변화 사이의 관련성이 그 내용. 19세기 트렌드의 추이에 대한 강의는 무난했으나 니체 뒤에서부터 꼬였다. 혁신 소용돌이에 휘발린 유럽의 문화는 각 분야마다 전체로부터 단절되고 더 작은 부분들로 쪼개졌던 것. 포스트 니체 문화에서 한 추세를 규정하기 위해 고안된 범주들은 일반화되지 못했고 그것은 예전처럼 설득력있게 변증법적으로 통합하여 역사적 과정을 설명하지도 못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눈쌓인 산길에 길을 내는 방식과 흡사했다. 다른 분야 예컨대 문학(신비평), 철학(분석철학)등은 하등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힘겨운 씨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각 분야의 자율성과 내적변화에만 한정하지 않고 그들 사이의 공시적 관계를 밝히는 방향으로 진행함으로써 폭넓은 의미의 공유된 사회적 경험을 추출해낼 수 있었다.
# 장면 2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에서는 자유주의적 중산계급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다. 서구의 다른 곳에 비해 늦었지만 변화는 빨라 입헌정부가 지속된 기간은 40년에 불과하고 승리를 축하할 새도 없이 후퇴와 패배가 시작되었다. 현대적인 운동이 나타난 것은 1890년대. 그 이후 20년만에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 이 모든 과정이 압축적으로 진행되었다. 고급문화의 속성 성장과 정치적 위기는 동전의 안과 밖이었던 셈. 비엔나의 엘리트 그룹은 함께 어울리는 경향이 강했다. 살롱과 카페는 다양한 지식인들이 각각의 이념과 가치를 공유하는 장소였고 사업계나 전문직 엘리트와 교류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전방위에 걸친 ‘비엔나 학파’의 혁신이 가능했던 것은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 이들은 정치학, 문학, 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동시적으로 전선을 형성해 그들을 길러낸 자유주의 체제의 가치를 공격했다. 19세기 후반의 비엔나 사회는 과학과 예술이라는 두 원리의 양립, 도덕가와 탐미주의자의 공존이라는 이중성을 지닌다.
문화사·지성사 만나는 파노라마
<세기말 비엔나>(구운몽 펴냄)은 두 개의 장면이 만나 이룬 하나의 파노라마다. 이 책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기간, 비엔나를 무대로 하는 문화사·지성사에 대한 연구. 지은이는 통시적 분석을 주로 하는 역사가와 공시적 분석을 주로 하는 문화분석가로서의 일을 함께 엮을 수밖에 없었다.
지은이는 우선 비엔나의 다중적인 성격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는 문화의 여러 분야의 고유한 발전과정을 추적한 다음, 이 분야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상호작용에 대해 기술한다. 당시 그곳의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작업이 긴밀한 교류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런 향상이 비엔나 문화의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지식인들은 르네상스적 교양인과 비슷하며, 리하르트 바그너가 추구한 것 같은 종합예술작품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건축가 카밀로 지테한테 영감을 준 것은 바그너의 음악이었고, 음악가 쇤베르크는 뛰어난 화가였으며, 극작가 츠바이크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를 우상으로 섬겼다. 이런 관심의 공유는 각자의 전문분야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들이 살던 사회는 그같은 예술적 종합의 건전한 토대가 될 수 있는 통합되고 안정적인 사회가 아니라 자아의 해체, 가치와 질서의 해체가 한참 진행중인 흔들리는 사회였다. 그렇게 때문에 비엔나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는 다면적 다중적 고찰이 필요하다. 다양한 면모를 갖고 있으면서 과거 질서가 해체되어가는 도시 전체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지은이가 택한 방식은 문화의 여러 분과를 차례로 탐색해가면서 그 사이의 관계를 노출시키기. 단편적인 조각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비엔나라는 도시, 말 그대로 20세기에 꽃피운 수많은 사조들이 싹튼 온상이었던 사회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 책은 비엔나의 문학, 미술, 음악 분야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혁기를 링슈트라세 건설이라는 공간적 사건의 틀에 담아 진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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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의 구시가를 둘러싼 도시성벽을 철거하면서 생겨난 80~90피트 넓이의 반원형 공간에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재개발되어 기념비적인 의사당, 대학, 시청사, 극장 등 기념비적 건물들이 들어섰다. 이런 재개발에 대해 카밀로 지테는 광장이 없음을, 오토 바그너는 도로의 부실함 등을 비판했다. 사진은 오토 바그너의 ‘박물관 도시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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