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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06 19:19 수정 : 2006.04.07 14:09

역사로 보는 한주

1970년 4월10일 폴 매카트니가 <데일리 미러>를 통해 ‘비틀즈’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1960년대 초 영국 리버풀에서 출발해(62년 레코드 데뷰) 세계 대중음악사상 전무후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대성공을 거둔 불세출의 4인조 록밴드 ‘비틀즈’는 실질적으로 해산했다.

존 레논(1940-80), 폴 매카트니(1942-), 조지 해리슨(1943-2001), 링고 스타(1940-)가 엮어낸 ‘비틀즈 음악’은 보편성과 혁신성을 겸비했으며, 리듬 앤 블루스, 발라드에서 하드록, 밴드음악에서 피아노곡까지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영역을 넓혀갔고 세계의 록팝스뮤직은 모든 영역에서 많든 적든 비틀즈의 영향을 받았다. 깜찍한 패션에다 당시까지 거의 완전히 분업화돼 있던 작사·작곡·연주에 노래까지 그들 스스로 다 해냈다. 그들이 미국에서 정식으로 레코드 대뷰한 64년 4월4일치 <빌보드> 싱글차트 1위부터 5위까지가 몽땅 비틀즈곡이었다. 리버풀은 지금도 전세계의 비틀즈 팬들이 몰려드는 명소가 됐으며, 영국 관광산업에서도 비틀즈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아티스트들 가운데 세대와 지역차를 넘어 이토록 오래, 그리고 광범위하게 대중적 사랑을 받은 경우는 드물다.

비틀즈의 해산 이유들은 수없이 거론됐으나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여러 설들 가운데 하나는 비틀즈 초기 성공의 일등공신이었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돌연사 탓이다. 그는 67년 8월27일 자택 침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는데, 사인은 업무 스트레스에서 오는 정신불안정을 진정시키기 위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알려졌다. 라이브 콘서트 중단조처에 따른 자신의 역할 상실, 또는 자신이 키운 비틀즈가 너무 커져버린데 따른 소외감 탓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비틀즈는 66년 소동과 논란으로 얼룩진 일본과 필리핀 공연에 이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캔들스틱 파크 공연을 끝으로 라이브 콘서트를 중단했다. 레코딩과 비디오 작업 등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연 그들의 도전은 계속됐으며 최대 히트작 <헤이 주드> 등도 그런 작업속에서 탄생했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그늘에 눌려 ‘조용한 비틀’로 불렸던 조지 해리슨이 엡스타인이 죽기 전 그룹 탈퇴 뜻을 내비쳤고, 역시 비슷한 시기에 일본출신 전위예술가 오노 요코를 만난 레논도 나중에 매카트니와의 갈등속에 탈퇴 조짐을 보였다. 엡스타인의 죽음 뒤 조직 결속력이 약화됐으며, 그의 사후 주도권을 쥔 매카트니와 나머지 멤버들간의 알력도 심화됐다.

녹음 등 관련기술의 급속한 발달과 라이브 음악과의 갭 확대, 공연의 대형화에 따른 연주수준 유지의 어려움, 유명세, 각자의 음악세계 구축, 그룹 재산운용을 위해 설립한 회사 애플의 실패 등도 거론된다. 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성공 자체가 곧 해체의 시작을 예고한 게 아닐까?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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