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성각/소설가, 풀꽃평화연구소장
|
아버지는 열두개 젖꼭지보다 많이 태어난
약골 새끼 돼지 한마리를 냇물에 버렸다
그 부조리가 이해안된 소년은
돼지 찾아 십릿길 냇가를 뛰었다
어둠을 헤치며 ‘달려라 냇물아’를 부르며
녹색 에세이/달려라 냇물아
대관령에서부터 불어닥치는 봄바람이 유난히 ‘지랄’같았던 지방소도시, 전쟁이 멈춘 뒤 아버지는 시장에서 제법 큰 규모의 건어물상을 벌였다. 장사가 번창할 때 학교를 다니던 형들은 ‘살양말’을 신고 유치원에도 다녔다고 한다. 그렇지만 내가 태어나 학교에 입학한 60년대 초반, 아버지는 상점을 접고 돼지를 기르기 시작하셨다. 하지만 형들의 좋은 시절과 달리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리어카를 끌고 ‘꾸정물’을 거두러 다녔다. 꾸정물이란 ‘돼짓물’이라는 말과 같이 쓰였는데, 음식쓰레기를 일컫는 영동지방 말이다. 그 성정이 매우 친근하고 관대하며 알고 보면 청결하기까지 한 돼지에게 인류가 줄기차게 가하고 있는 부당한 오해와 몹쓸 대접처럼, 돼지가 먹는 음식조차 꾸정물이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사용한 것은 참 지나친 처사였다고 생각된다.
나는 소문난 개구쟁이였지만, 아버지를 유난히 좋아했기에 꾸정물 거두는 일만큼은 불평없이 충직하게 도왔다. 내 유난히 굵은 장딴지도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때 붙은 것이 아닌가 싶은데 만약 리어카운전을 누가 잘하나, 그런 대회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최소한 준결승 정도는 오를 자신이 있다. 열 댓마리쯤 키우던 우리집 돈사(豚舍)는 시에서 2㎞쯤 떨어진 남대천 방둑 아래에 있었다. 돈사 옆으로는 하천을 낀 제법 너른 밭도 있어서 감자도 심고 파 농사도 지었다. 어느 해 초여름이었을 것이다. 거름을 치운 뒤, 아버지가 느닷없이 새끼 돼지 한 마리의 다리 한 짝을 들고 허공에서 빙빙 돌리더니 냇물에 휙 던지시는 것이었다. 너무나 놀라 여쭸더니, “이 놈은 딴 놈들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행위와 요령부득의 발언은 특별히 나를 귀여워하셨고, 일을 마치고 타는 듯한 노을을 바라보며 빈 리어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올 때 말릴 수 없는 호기심으로 이 세계에 대해 재잘대던 막내의 충실한 말벗이 되어주시곤 했던, 그 아버지가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 저녁 밥상머리에서 어머니를 통해 사정을 알게 된 즉, 어미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열두 개의 젖꼭지 수보다 한 마리 더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중 제일 약한 새끼돼지는 비록 세상에 아무런 해악을 끼친 바 없지만 단지 약하다는 이유로 희생되어야 한다는 거였다. 그래야 다른 형제돼지들이 젖꼭지를 하나씩 차지해 온전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약하게 태어났다는 것이 곧 형벌의 이유였다. 어린 나로서는 그 부조리가 도무지 납득이 안 됐지만, 그보다는 저녁밥을 먹는 내내 어두워지는 냇물에서 하염없이 떠내려갈 새끼돼지를 어떻게 하면 건져낼 수 있을까, 그게 더 걱정스럽고 급한 일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어른들 몰래 집을 빠져 나온 나는 40년 전 지방소도시의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아버지가 돼지를 던졌던 지점에서부터 바다에 이르는 10리길 방둑을 냇물을 따라 뛰듯이 걸어내려갔다. 어느 지점에선가 물가로 밀려나와 꿀꿀대는 새끼돼지의 목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고 간절히 믿고 있었을 게다. 일제 때 쌓았을 게 틀림없는 개천의 방둑에는 돌망태를 엮은 녹슨 철조망이 더러 풀어헤쳐져 어린 소년에게는 매우 위험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잡풀도 소년의 키만큼 우거져 있었고, 물뱀이나 자라가 살던 냇물이었다. 물뱀은 독이 없다지만 미끈거려 싫었고, 자라 이빨은 철사도 휠 정도로 무서웠다. ‘그때 그 소년’은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해 떨어지면 무서워 뒷간은커녕 밤똥 누러 마당 구석에도 혼자 못 나가던 그 소년이 새끼돼지를 건지겠다는 뜨거움으로 미쳐 있었다.
그 방둑은 여름이면 가족 모두 줄을 서서 해수욕을 가던 길이었다. 아버지는 짐자전거에 천막과 장작을 싣고, 어머니는 무쇠솥을 머리에 이고, 우리 형제들은 제각각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의 수박과 참외를 들고, 땀 뻘뻘 흘리며, 10리길 해수욕을 가던, 그 방둑길이었다. 방둑 아래 하얀 신작로에는 햇살에 반짝이는 미루나무가 바람에 흔들렸고, 바닷가에서 가장 가까운 과수원 앞 ‘국민학교’에 이르면 매미소리가 귀청이 찢어지도록 진동했다. 방둑이 끝나면 곧 바다로 이어졌는데, 발바닥에 불이 날 것처럼 뜨겁고 눈부셨던 백사장에 이르면 아버지는 천막을 치고 솥을 건 뒤에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매고 ‘사루마다’ 바람으로 바다로 들어가셨다. 어머니는 무와 고추장을 넣고 고깃국을 끓이고, 우리는 이중섭의 은박지에 그려진 아이들처럼 발가벗고 바다에 뛰어들어 고개를 파도 위로 내밀고 죽죽 헤쳐나가는 아버지의 늠름한 헤엄을 흉내냈다.
지척을 모를 어두운 방둑 아래 냇물가에서 얼마나 헤맸을까. 삐죽이 튀어나온 철사에 옷이 찢어지더니 피도 나고, 더러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참으로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바다가 얼마 남지 않은 하구의 갈대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새끼돼지 소리였다. 꿀꿀꿀, 춥고, 배고프고, 외롭고, 무서움에 찌든 새끼돼지의 가냘픈 울음소리가 냇물 가장자리에서 들렸다. 아버지가 버린 그 새끼돼지였다. 바로 그 순간 느꼈던, 끝까지 살아낸 어린 생명에 대한 벅찬 반가움과 기쁨은 이후 오십이 넘도록 나는 다른 어떤 순간에도 다시 느낄 수 없었다.
젖은 새끼돼지를 품에 안고 캄캄한 방둑길에서 돈사까지 다시 되돌아올 때, 돼지새끼만큼 내 가슴도 어떤 감격으로 세차게 뛰었을 것이다. 40년 전, 지방소도시 외곽의 밤은 달빛이나 별빛밖에 없었다. 만약 그때가 흐린 날이라면 얼마나 캄캄했을까. 하지만 개울을 따라 내려갈 때 만났던 어둠은 새끼돼지를 찾겠다는 열망 때문에 어둡지 않았고, 다행히 돼지를 찾아 안고 돈사로 올라올 때의 그 어둠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환한 기쁨으로 인해 또한 어둡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마음의 힘과 관련해 여전히 깊이 생각해 볼만한 일이 아닌가 싶다. 이튿날 어른들에 의해 바로 발견된 그 돼지새끼는 결국 내가 학교에 간 사이에 처단되고 말았다. 세월이 많이도 흐른 뒤, 어쩌다 나는 환경운동을 하는 글쟁이가 되고 말았을까. 곰곰히 지난 시간을 되짚어볼라치면, 아마 어린 날의 그 새끼돼지 사건과 무관하지 않은 것만 같다.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그때 부르던 노래였다.
섹션 <18.0> 창간 때부터 지금까지 약 1년간 이 난에 연재해오신 작가 최성각님의 ‘녹색 에세이/ 달려라 냇물아’가 이번 호로 끝납니다. 울림깊은 글로 지면을 빛내주신 최성각님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난은 새 타이틀에 새 필자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집니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