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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13 18:50 수정 : 2006.04.14 14:07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갈비 먹으며 떠드는 노인들을 보며 내 아버지와 그의 친구들을 떠올렸다
이 자리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그들
내 나라에 와서 가는 곳마다 “일본인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심야통신/그리운 조국(1)

3월에 잠시 일본에 가서 이삿짐 부치는 일 따위를 마치고 4월1일 다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드디어 한국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도착 첫 날 밤 아내와 둘이서 가까운 갈비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지쳤던 데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 덕인지 요리도 맥주도 각별하게 맛이 있었다. 가게는 만원이어서 술기운이 오른 사람들이 기분좋게 담소하는 소리로 떠들썩했다. 노인들 그룹도 많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불현듯 지금 아버지가 여기 계셨더라면 하는 생각이 솟구쳐올라왔다. 살아계시다면 84살이다. 살아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다.

1922년 충청남도 청양군 산골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6살 때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생업인 폐품수집 일을 도왔다. 모아 온 폐품더미에서 책이나 잡지를 찾아내 읽는 일이 가장 즐거웠다고 한다. 그 덕인지 학교에 거의 다니지 않았는데도 지식은 풍부했고 말솜씨도 있었다. 해방 뒤 조부모와 가족들은 귀국했으나 20대 청년이었던 아버지는 일본에 남았다. 귀국한 가족의 생활은 불안정했기에 장남인 아버지가 돈을 부쳐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미 결혼했고 어린 아들이 둘이나 있었다. 6살 때부터 일본에서 살아온 아버지로서는 조국엔 우인도 지인도 없고 일자리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처지였다. 지금 일본에 있는 재일조선인 다수는 이때의 아버지와 같은 사정으로 일본에 남았던 사람들의 자식들이다.

아버지는 섬유제품 브로커 등으로 장사를 시작해 성공했을 때는 작은 방적공장을 경영하기도 했으나 막판에 실패해 집도 날리고 만년을 실의속에 보냈다. 아버지의 수완이 신통찮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에는 일본의 은행들이 조선인에게 융자를 해주지 않는 게 당연한 풍토여서 지주한테서 공장 부지를 빌리기도 어려웠다. 아버지 우인인 가나야마씨는 60년대 초에 ‘북’으로 돌아갔다. 북(조선) 출신도 아니고 거기에 친척과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산주의나 주체사상을 신봉한 것도 아니다. 가나야마씨가 북에 돌아간 것은 거기서 보람있는 일, 살아갈 보람이 있는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물론 당시 한국도 재일동포에게는 전혀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없었던 시대다. 가나야마씨한테서 단 한번 편지가 온 적이 있는데, 신의주 방적공장에서 책임있는 자리에 앉게 됐다는 기쁨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그 뒤에는 소식이 없었다.

또 한사람의 아버지 우인인 다케이시씨는 그 세대로선 드물게 대학을 나온 지식인으로 가라데의 달인이었다. 혈기왕성한 민족주의자였으나 만년에는 고독하게 홀몸이 되어 돌보는 이도 없이 교토시 한구석 좁은 방에서 피를 토하며 돌아가셨다. 위암이었다.

가나야마, 다케이시라고 여기서 일본이름을 쓴 것은 아버지 친구들이 일본이름으로 서로를 불렀기 때문이고 그들의 본명을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들 세대에게 조선민족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 말에 내 형들이 모국 유학길을 선택했을 때 그것을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 것은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 형들도 조국에서 감옥에 갇혔고 그들이 석방되는 날을 보지도 못한 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갈비구이 식당에서 소주를 대작하며 담소하고 있는 노인들을 보고 있자니 그들이 아버지와 가나야마씨, 다케이시씨로 보였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우리 집에 모여 민족의 운명에 대해 목청 높여 얘기하던 그 사람들. 식민지지배, 민족차별, 남북분단이라는 현실 때문에 쓸쓸하게 죽어간 사람들. 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야말로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이 나라에서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당혹스러운 것 가운데 하나는 어디에 가더라도 “외국 분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 일이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재일조선인이지만 국적은 한국이며 ‘외국인’이 아니다. 더우기 ‘일본인’은 절대 아니다.

소학교(초등학교) 시절 어느 재일조선인 아동이 두들겨맞고 있는 현장을 우연히 목격한 적이 있다. 일본인 악동들이 ‘조센, 조센’이라 욕하면서 때리고 있었다. 그 아이는 가난한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 살고 있었고 할머니가 흰 치마저고리 차림에 배 모양의 고무신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조선인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용기를 발휘해 “폭력은 그만 둬” “약자에게 이지메(해코지) 하지 마”라고 외치며 말리고 나섰다. 그래서 그 일은 수습이 됐지만 내게는 꺼림칙한 생각이 남았다. 내게는 기껏 “폭력은 그만 둬”라는 일반적인 도덕률을 휘두를 용기밖에 없었고 “나도 조선인이야”라고 선언할 용기는 없었다. 자신도 두들겨맞을 각오까지는 할 수 있었지만 굳이 일상적인 차별을 받는 처지까지를 감내할 각오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약자에게 이지메 하지마”라는 건 자신을 ‘약자’ 즉 ‘조선인’이 아닌 위치에 두고 하는 말투로, 위선적인 말이다. 두들겨맞고 있던 조선인 아이는 그 자리를 떠날 때 힐끗 나를 쳐다봤는데 그것은 도와준데 대해 감사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자신을 때린 일본인을 보는 것과 같은 눈빛이었다. 당연했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나는 아무리 정의파처럼 처신해도 자신을 차별하고 때린 또래들의 한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일본인’만은 되지 않겠다고 계속 다짐해왔다.

그랬던 내가 드디어 자기 민족의 나라에서 생활을 시작했는데 가는 데 마다 “외국인입니까?” “일본인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이다. 만약 아버지와 가나야마씨, 다케이시씨가 살아 있어서 지금 이 나라에 와 있다면, 하고 상상해 본다. 역시 “외국인입니까?” “일본인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게 될까?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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