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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일/문학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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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길바닥으로 쏟아져 나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끊어진 꿈·못다쓴 공책 혼자 기억의 향불 피우는 고은의 ‘만인보’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어느 날 선생님은 칠판에 ‘핼리 혜성’이라 써놓고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이 이상한 별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있잖아, 요놈이 우주를 돌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와 오늘 박치기를 하면 어찌 되는지 알아? 아이들은 눈이 동그래진다. “그렇게 되면 말야, 늬네들 내일 학교에 안 나와도 돼.” 선생님한테서 그 얘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그날 저녁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어쩌면 그게 가족의 마지막 식사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년은 엄마한테 야단맞고 혼자 제 방으로 돌아가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지구의 끝장은 어떤 것일까? 그는 밤중에 식구들 몰래 다락을 타고 지붕에 올라가 밤하늘의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세계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올해로 101살이 되는 미국 시인 스탠리 쿠니츠의 시 <핼리 혜성>의 내용이다. 시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시는 이야기를 갖고 있고 이야기로의 번역이 가능하며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한다. 시 한 편이 응축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긴 영화 한 편이 나올 수도 있다. 시의 1분은 영화의 한 시간, 산문의 두 시간이다. <핼리 혜성> 속의 소년은 그래서 어찌 되었을까? 그는 왜 세계가 끝나기를 기다렸을까? 학교 가기 싫어서? 지구가 어떻게 끝장나는지를 보고 싶은 호기심, 궁금증, 흥분 때문에? 세계의 종말을 본다는 것은 세계의 태초를 목격하는 것이나 진배없이 신나는 일? 소년은 지붕에서 내려왔을까? 우리는 안다. 거기서 내려온 소년이 커서 그 자신 선생님이 되고 여자의 남자, 아이의 아비, 시인, 과학자가 되었으리란 것을. 우리는 또 안다. 어른이 되어서도 사람들의 가슴 한 구석 기억의 깊은 웅덩이에는 시 속의 화자처럼 밤하늘 별들을 쳐다보던 소년 하나가 아직도 지붕에서 내려오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을.
4.19가 터지던 1960년의 3월과 4월, 한국의 아이들이 학교를 뛰쳐나온 것은 핼리 혜성 때문이 아니다. 세계의 끝장을 보기 위해 그랬던 것도 아니다. 그들의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은 ‘3.15 부정선거 무효,’ ‘독재 타도,’ ’물러가라 자유당‘ 같은 구호들, 그리고 책가방이다. 시인 쿠니츠의 소년이 하늘을 보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가던 날 서울의 국민학교 아이들은 “국군아저씨들 형제자매에게 총부리 겨누지 마세요”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대에 합류한다. 그 1960년 3월과 4월 그렇게 길바닥으로 쏟아져 나갔던 우리의 초등생, 중학생, 고등학생 아이들은 어찌 되었는가? 그 때 총 맞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아이들이 지금은 우리의 나이든 이웃으로, 아이들의 어미 아비로, 혹은 할아비 할미로 이 땅 어디에선가 살고 있다. 그러나 죽은 아이들은? 지금 누가 그들의 짧은 생을 기억하는가? 지금 누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누가 그들의 끊어진 꿈, 중단된 생애, 가방 속의 못다 쓴 공책을 기억해주는가?
최근에 나온 고은 시인의 21, 22, 23번째 연작 <만인보> 시편들은 그 1960년 꽃피는 춘삼월에 죽어간 아이들의 이름과 그들의 토막 난 삶을 기억하는 일에 집중적으로 바쳐지고 있다. 시집에 나오는 아이들 상당수가 학생이지만 학생 아닌 아이들도 있다. 이 기억의 출석부에서 아이들은 누구도 ‘무명’이 아니다. 마산고 1학년 13반 급장 김용실, 중학생 교복을 입은 지 열하루만의 차대공, 수송학교 6학년 3반 권한승, 염리동 철공소 소년 이채섭, 열세 살의 덕성여중생 최신자, 야간공민학교 우등생 홍성순, 경기고 2학년 수학천재 이종량, 2대독자 김효덕, 금호초등 6학년 정태성, 동래여고 김순임의 편지가 든 책가방을 교실에 두고 나온 부산고 이의남, 부산 남학생들의 여신이었던 데레사여고 정추봉, 죽음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 ‘부모님 전상서’를 쓰고 나온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 아, 이런 이름의 아이들이었구나, 그들에게도 이름이 있었구나!
그 아이들에게도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만인보>에서 환기 받는 일은 아주 돌연하고도 순수한 충격이다. 대부분은 우리가 몰랐던 이름, 잠시 알았어도 지금은 잊어버린 지 오랜 이름들이어서? 아니다. 그때로부터 근 반세기가 흐른 지금 그 이름들은 우리가 몰라도 되는 이름, 더는 알 필요가 없고 아무도 기억하고자 하지 않는 이름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망각은 세월의 더께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잊어버리려는 의지, 그것이 망각의 더 큰 이유다. <만인보>가 환기시키는 것은 우리가 발동시켜온 바로 그 망각의 의지다. 그런데 <만인보>의 시인은 기억하고자 한다. 망각의 축제가 질펀하게 벌어지고 있는 시대 한복판에서, 역사조차도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듯한 시대에, 시인은 혼자 기억의 제단에 향불 피우고 우리가 잊어버리고자 한 이름들을 불러낸다.
지금까지 나온 <만인보> 시집 23권 전편을 통해 시인이 시도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을 ‘무명성’으로부터 건져내는 일이다. <만인보>의 인물들은 ‘기능’으로 존재하지 않고 ‘사람’으로 존재한다. 대장장이는 그냥 대장장이가 아니라 ‘뻐드렁니 한만걸’이고 병원 간호원은 그냥 간호원이 아니라 ‘우정숙’이며 ‘좌익학생 강태수의 애인’이다. 대천읍 술장사는 ‘생불이 할머니,’ 새터 머슴은 ‘대길이 아저씨’다. 청주시청 청소부는 아무도 그 이름 알 필요 없는 기능인으로서의 청소부가 아니라 수염발 희끗한 두 영감 ‘최명식’과 ‘유지행’이다. 아무도 무명이지 않고 이방인이 아닌 곳, 거기가 고향이라면 <만인보>의 세계는 모든 이가 모든 이를 알고 이름으로 불러주는 고장, 우리의 ‘고향’이다. 그 고향은 사람들이 서로 이름을 알 필요 없는 기능관계로만 접촉하고 무명으로 살아야 하는 거대 도시와는 너무도 다른 곳이다. 페르디난트 퇴니스가 ‘게마인샤프트’라 부른 작고 친밀한 마을 공동체가 <만인보>의 고향땅이다. <만인보>에는 팔도의 온갖 사람들이 다 나오지만 그들은 시인이 만드는 마음의 게마인샤프트에서 모두 ‘고향사람’으로 산다.
고향은 우리가 두고 떠나온 나라, 상실한 땅이다. 우리의 가슴은 이 상실과 어떻게 화해해야 하는가? 46년 전 죽어간 아이들의 그 잃어버린 꿈과는 또 어떻게 화해하는가? <만인보>는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듯하다. 스탠리 쿠니츠의 소년처럼 지붕에 올라가 별들을 바라볼 틈도 없이 길바닥에서 숨 끊어진 우리 아이들의 그 상실의 생애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들도 우리 가슴 깊은 기억의 사원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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