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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20 16:50 수정 : 2006.04.21 14:07

동아시아는 지금

나지막한 산들 사이로 굽어져 바다로 빠져나가는 텅빈 길 한복판에 벗겨진 운동화 한짝이 나뒹굴고 있다. 왼편에 세로 내리받이로 ‘납치’라는 붉은 색 바탕의 흰 글씨 아래 ‘일본은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잔잔하지만 눈물샘을 자극할 만큼 강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일본 정부가 지난 17일 20만장을 인쇄해 전국 공공시설과 역, 학교 등에 배포한 포스터다. 일본인 납치문제를 두고 정부가 만든 이 첫 선전포스터 발표행사를 주관한 사람은 스즈키 세이지 관방 부장관. 그는 그날 “절대로 일본에 돌아오실 수 있게 하겠다는 정부의 강한 결의를 나타냈다”고 설명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도 “일본의 주장이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며 흡족해했다.

앞서 지난 11일 일본인 납북자 요코타 메구미가 북한에서 결혼한 남편이 한국에서 납치당한 사람으로 추정된다는 유전자검사 결과를 공식 발표한 것도 내각관방쪽이었다. 당시 동북아시아협력회의(NEACD) 명목으로 간만에 남북한을 포함한 6자회담 참가국 대표급들이 모인 비공식 도쿄 6자회담이 진행중인 상황에 굳이 맞춘 듯 나온 그 발표는 회담 실패를 상징하고 조롱하는 해프닝처럼 비쳤다. 회담준비에 분주했던 일본 외무성이 그 발표로 혼란에 빠졌다는 보도가 나온 점으로 미뤄, 6자회담 내지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일본 정부 내부분열이 진행중인 게 아닌가 하는 관측도 있었다. 내각관방의 수장은 차기총리 1순위로 관측되는 강경우파 아베 신조 장관이다.

동북아협력회의를 국제적인 납치문제 선전장으로 ‘날치기’하기로 사전공모라도 한 듯한 일본의 이런 일련의 행태가 내각관방쪽의 단독작품인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어쨌든 동북아협력회의 참석 6자회담 대표들은 졸지에 주역이 아니라 들러리로 전락한듯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월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사상 첫 동아시아 정상회담 때도 미국과 손잡고 애초 예정에 없던 인도와 호주, 뉴질랜드 등의 ‘역외국가’들을 끌어들였고, 회담은 용두사미로 흐지부지 막을 내렸다.

한때 요란했던 ‘동아시아공동체’ 담론은 이런 와중에 어느새 신기루처럼 가물가물 사라져가고 있다. 이런 현상에 공헌(?)해온 일본 집권세력의 최근 행동패턴에서 끌어낼 수 있는 한가지 공통분모는 ‘중국’이라는 존재다. 마치 중국이 주도권을 쥔 일이라면 어떤 것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겠다’(포스터의 문구처럼)는 듯한 기세가 읽힌다. 패권다툼이라 할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 독자의 세력결집 자체에 신경질적인 거부반응을 보여온 미국의 전략과도 무관하지 않아보이는 이런 일본의 최근 행보를 보노라면, 북한이라는 대책없는 빈곤국가는 그저 그런 전략을 위해 적절한 때에 동원돼 활용되는 기막힌 선전재료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든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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