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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20 17:02 수정 : 2006.04.21 14:07

김찬호/한양대 강의교수·문화인류학과

딱히 ‘쓸모 없는’ 도심의 공백지대 시간의 속도에서 잠시 풀려나 인간을 만나는 공간
이런 공간이 많을수록 다양한 삶 찾아들고 다양함 엮어 삶의 드라마를 만든다

생활속의 문화사회학

“딱히 쓸모없어 이름짓기조차 어려운 그런 공간은 건축의 생명력을 길게 하며, 정해진 규율로 제시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다양하게 만든다. (…) 쓸모없는 공간, 예를 들어 우리네 ‘마당’은 참 좋은 예가 되며, 생활의 중심이나 관상의 상대일 뿐인 이방의 마당과 달리, 우리의 마당은 생활뿐만 아니라 사고의 중심이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공동체를 발견케 하는 의식의 공간이다. 이를 ‘무용의 공간’이라고 하자.” (승효상 [빈자의 미학] 중에서)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맙시다 - 스스로 먹이를 찾아 생태계의 당당한 일원이 되도록 도와주세요 (**구청 공원녹지관리과)’ 이것은 서울의 어느 공원에 걸려 있는 현수막의 문구다. 한강시민공원사업소에 따르면 요즘 비둘기들은 먹이가 풍부해진 환경에서 생식에 비정상적으로 몰두하기 때문에 개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고 한다. 그리고 배설물이 많아지면서 공원 미관을 해칠 뿐 만 아니라 거기에 함유된 강한 산성이 각종 시설물을 부식시켜 공원 환경을 악화한다고 한다. 그래서 시민들에게 먹이 주기를 자제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주택 개발로 삶터를 잃어 시인의 동정을 샀던 ‘성북동 비둘기’, 한국의 번영과 도약을 만방에 알리면서 잠실의 창공을 비행했던 88년 올림픽의 비둘기들, 그 평화의 상징이 이제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몸도 비대해져 ‘닭둘기’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것일까. 유난히 비둘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공원에 가서 관찰해보자. 벤치에 앉아서 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하염없이 비둘기의 식사를 챙기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어린 아이들, 노인들, 그리고 실직자로 보이는 이들. 그 공통점은 무엇인가. 시간이 많다는 것, 그리고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약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을 듯하다.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흐뭇함, 자신에게 기대어 목숨을 이어가는 타자가 있음으로 확인되는 존재감이 아닐까. 비둘기와 마주하는 동안 이들은 그 미물(微物)의 안위만을 위해 아무 사심 없이 온전히 몰입한다. 공원은 그러한 보살핌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생활공간이다.

‘공원’이라는 명사에 포괄되거나 연계되는 대상은 실로 광범위하다. 주택가의 작은 쌈지 공원, 놀이터, 학교 운동장, 캠퍼스의 정원, 숲이나 야산, 고궁과 유원지, 동물원이나 테마 파크, 도심지의 광장, 그리고 거대한 국립공원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폭넓은 스펙트럼의 공간들을 묶어주는 고리는 무엇일까. 열려 있어서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것, 그 땅의 용도가 특별하게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 근본적으로 그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로 가장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휴식에서 이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그것이 축적되어 고유한 장소성이 형성된다. 세계의 많은 도시들은 저마다 독특한 공원의 이미지로 자신의 얼굴을 꾸민다. 뉴욕의 센트럴파크, 런던의 세인트제임스파크, 토쿄의 우에노공원, 북경의 천안문광장….

서양의 도시 역사에서 공원의 뿌리는 그리스 시대의 시민광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중세에 접어들어 왕실의 정원과 수렵장이 있었고, 근대에 접어들어 그것이 상류 시민계급을 위해 개방되었다. 그러다가 산업화가 진척되고 노동자 대중의 규모가 늘어나면서 그들의 여가를 위해 대규모의 도심 자연 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그에 비해 동양에서는 그러한 공원이나 광장이 존재하지 않다가 근대사회에 접어들면서 서양식의 도시 계획이 이뤄지면서 도입되었다. 서울의 경우 한말 원각사터에 개설된 파고다공원(탑골공원)을 효시로, 그 뒤에 수많은 공원이나 광장이 건설되었다. 최초의 동물원과 식물원이 들어선 창경원, 대통령 선거 유세 때마다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었던 장충단공원, 가족 나들이의 설렘으로 가득했던 어린이 대공원, 국군의 날 거대한 퍼레이드가 펼쳐졌던 여의도 광장 등은 각 시대의 중요한 풍경들을 기억하고 있다.

부동산의 논리로 조악하게 개발되어온 도시에서 공원은 계속 비좁아졌다. 그리고 점점 분주해지는 도시인들에게 공원은 스쳐지나가는 공백지대일 뿐이다. 그래서 그 곳을 메우고 있는 이들은 할 일 없고 갈 곳 없는 노인들, 연애 삼매경에 빠진 젊은이들, 결혼 기념사진을 찍는 신랑신부들, 봄날의 오후를 즐기는 어린아이와 그 엄마, 스케이트 보드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거나 야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 등이다. 공원은 그 안에서 누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얼마든지 바뀌는 곳이다. 시위나 공연 같은 공(公)적인 집합 행동이 일어나기도 하고, 특별한 일 없이 그냥 더불어(共) 있음의 즐거움을 만들기도 하는, 텅 비어 있는(空) 그릇이다.


그 공공 공간(公共空間)은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노장 철학의 역설이 그대로 실현되는 곳이다. 건축가 승효상 씨는 위에 인용한 책에서 말한다. ‘그러한 (쓸모없는) 공간이 많을수록 더욱 다양한 삶이 그 안에 담기게 되고, 그 다양함이 어떤 시스템에 의해 엮여지면 그 공간은 시퀀스를 가지고 삶의 드라마를 만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당은 새삼스러운 의미로 다가오는 듯하다. 마당의 멋은 스스로를 주장하지 않으면서 다른 공간과 사물들을 넌지시 아우르며 돋보이게 하는 넉넉함에 있다. 공원은 그러한 마당의 한가로움을 집 바깥으로 끌어내 만인을 초대하는 쉼터다. 숨 가쁘게 내달리던 시간이 속도에서 잠시 풀려나 느긋하게 인간을 만나는 공간이다. 우리들은 공원에 머물러 고단한 심신을 달래면서 생활의 시나리오를 새롭게 쓴다. 푸르러오는 숲과 하늘을 화폭 삼아 흩날리는 꽃잎들을 물감 삼아 자화상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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