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4.20 17:08
수정 : 2006.04.21 14:08
역사로 보는 한주
1937년 4월26일 스페인 바스크지방 소도시 게르니카에 나치 독일의 의용항공대 ‘콘도르 여단’과 이탈리아 공군이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시민 등 비전투원 2천여명이 숨진 그 만행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대작 <게르니카>(세로 3.5m × 7.8m)로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졌다.
제1차 세계대전 뒤 공화제로 이행(31년 ‘스페인혁명’)한 스페인은 좌우파 대립속에 혼란기를 거친 뒤 36년 좌파 마누엘 아사냐의 인민전선정부가 등장했으나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 장군이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반란을 일으켜 전면적인 ‘스페인 내전(1937년 7월~39년 3월)’이 시작됐다. 프랑코는 국내에선 군부를 비롯해 가톨릭 교회와 지주, 자본가 등 우파세력의 지지를 받았고 국외에선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았으며, 포르투갈 독재정권도 프랑코편에 섰다.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 대 반파시즘 공화파 진영간의 대결 형태로 제2차 세계대전 전초전과 같은 양상을 띠었으나, 인민전선정부쪽을 지원한 국가는 소련뿐이었고, 여기에 각국에서 달려온 국제의용군(국제여단)이 가담했다. 당시 영국은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중립을 지켰으며 프랑스 역시 인민전선정부가 붕괴되면서 중립에 머물렀다. 더우기 영국 프랑스는 38년 9월 뮌헨회담에서 독일의 요구를 수용하는 유화정책을 취함으로써, 파시즘 대 반파시즘 구도의 전유럽적 확산속에 국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기를 고대했던 인민전선정부를 좌절시켰다.
국제여단에는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나중에 프랑스 문화부장관이 된 앙드레 말로도 참가해 각각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희망>을 썼으며, 조지 오웰은 르포 <카탈루냐 찬가>를 남겼다. 헤밍웨이가 존 던의 시를 인용한 것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어떤 친구의 죽음도 나 자신의 소모려니, 그건 나도 또한 인류의 일부이기에. 그러니 묻지 말지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느냐고.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게르니카 학살에 항의한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는 풍부한 색채를 사용한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단색화에 가까운데,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사람, 미친듯 울어대는 말 등 사람과 동물의 처참한 고통을 큐비즘 양식으로 강렬하게 묘사함으로써 전쟁의 야만과 비인간성, 절망, 그리고 민간인 폭격의 잔혹성을 생생하게 고발했다.
피카소는 원래 37년 파리 만국박람회 에스파냐(스페인)관 벽화제작을 의뢰받았으나 조국땅의 비극적 소식을 듣고는 한달여만에 대작을 그려 <게르니카>라는 이름을 붙였다. <게르니카>는 프랑코의 국내반입 거부로 뉴욕 근대미술관에 오래 소장됐다가 그의 사후인 81년에야 스페인에 돌아갔다. 피카소의 <코리아에서의 학살>(51년)도 유명하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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