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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20 20:28 수정 : 2006.04.21 14:10

산해 <살아남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아깝다 이책

이 책을 발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특별히 사회생물학 분야를 뒤지다 찾아낸 것도 아니었고, 더글러스 W. 모크라는 생물학자의 이름이 익숙했던 것도 아니었다. “가족 투쟁의 진화”라고 직역할 수 있을 듯한 원서의 부제가 More Than Kin and Less Than Kind라는 원제보다 강하게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가족”과 “투쟁”이라는 얼핏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가족”과 “투쟁”만큼 잘 어울리는 조합도 없다. 인간의 역사는 부모와 자식 간에, 형제간에, 부부간에 이익을 다투며 벌였던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던가. 문제는 이 책이 광기와 유혈로 얼룩진 역사에 대한 인문서적이 아니라 표지에 백로 둥지 사진이 박힌 동물학 서적이라는 데 있었다.

폭발적이진 않지만 꾸준히 인기를 끄는 TV 프로그램이 자연 다큐멘터리다. 시청자들은 동물들의 가족사랑을 담은 감동적인 멘트와 아름다운 영상을 접하며 눈시울을 적신다. 하지만 실제로 자연은 감동과 아름다움의 제공처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힘없는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맹수류만 잔인한 게 아니라,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들 사이에 경쟁과 다툼과 음모가 끊이지 않는다. 냉혹한 어미는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하고 심지어 새끼의 죽음에 일조하기까지 한다. 동물의 세계에도 블러드 메리나 철가면이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자연에서 벌어지는 가족 간의 무시무시한 생존경쟁을 연구 관찰한 기록이다.

천륜을 저버린 사람을 가리켜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하는 건 미물도 자기 혈육은 챙기는 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러한 기본 전제를 무너뜨리는 충격과 함께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약육강식의 투쟁이 종과 종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혈족 사이에서 벌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몇몇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자연계 전체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라는 것, 눈물겹도록 이타적으로 보이는 일부 동식물의 생태도 따지고 보면 지독하게 이기적인 발상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것.

한마디로 살벌한 책이었다. 하지만 동물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동족상잔의 비극은, 사실 그들에겐 비극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당연한 행동이며 일상일 뿐이다. 결국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란 말이 틀렸다든가, 자연이란 그다지 아름답지도 감동적이지도 않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동식물의 생태까지도 인간의 잣대로만 판단하려는 독단은 좀 반성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인간이 자연더러 ‘비인간적’이라고 몰아붙일 수야 없지 않은가. 형제를 밀어내고 자손을 취사선택해서 종족 전체의 살 길을 도모하는 생물들의 삶은 그 자체로 엄숙한 일 아닌가.

진화의 관점에서는 동물의 행동이 인간보다 훨씬 합리적이며, 자기 먹을 건 타고난다면서 일단 자식을 힘닿는 한 많이 낳고 보던 우리 조상들이 현대인들보다 현명했다고, 추천과 감수를 맡은 최재천 교수(이화여대 자연과학대 석좌교수)도 우리의 선택에 힘을 실어주었다. 영어로는 엄청 운율이 잘 맞아 보이는 원제 대신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살아남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라는 한국어판 제목은 생존과 번식과 진화를 위해 그렇게 피 튀기며 살아온 지구상의 모든 생물종에 바치는 경의이기도 했다.

인간 역시 그러한 갈등과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할 자연의 한 구성원일 수밖에 없는데, 인간은 곧잘 그 사실을 망각하고 외면한다. 이 책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가족과 사회와 자연 전체에 대해 좀더 겸허하고 개방된 관점을 가질 기회를 줄 것이라 믿기에, 우리는 늘 이 책이 아깝다.


김수란/산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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