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오래 살다 보면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로 일본 내 삶의 어려움을 토로한 김씨는 “윤동주가 형무소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실증적으로 밝히는 것도 문학적 평가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며 연구자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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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촐한 너무나 조촐한… |
지난 16일은 민족시인 윤동주의 60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해방을 불과 반 년 남겨둔 1945년 2월 16일 적국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아름다운 청년 윤동주는 스물여덟의 꽃다운 생애를 접었다. 감옥 안에서 정체 모를 약물을 주입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명확한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대부분의 조사에서 윤동주는 거의 예외없이 ‘좋아하는 시인’ 1위에 오르곤 한다. 그가 자신의 시집 서문 격으로 써 둔 〈서시〉는 국민적 애송시로 자리잡았다. 젊은 여성들을 상대로 한 어떤 조사에서는 ‘연애하고픈 남자’ 1위에 그가 오르기도 했다. 민족시인 윤동주의 힘은 국경과 언어의 장벽조차도 뛰어넘는 것인지, 일본 후쿠오카에는 그의 시를 읽고 토론하는 순수 민간 모임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이 활동 중이기도 하다.
그토록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시인의 60주기는 그러나 너무도 허술하게 지나가 버렸다. 그의 기일인 16일 오후 시인의 모교인 연세대 교정에 세워진 시비 앞에서 조촐한 추모 모임이 열린 것이 기념 행사의 전부였다. 국내의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가 태어난 만주, 그가 숨을 거둔 후쿠오카, 그의 또 다른 모교인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 살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등 해외에서는 오히려 국내에서보다 더 성대하고 본격적인 추모 행사들이 열렸다는 소식이다.
국내에 윤동주의 시를 주제로 논문과 평문을 쓴 연구자·평론가들이 허다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이름을 단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도 적지는 않다. 하물며 그의 시를 외우거나, 일기와 편지에 베껴 적은 독자들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지난 16일 우리는 그 빚을 갚을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 버렸다.
“윤동주의 〈서시〉가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난주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동포 시인 겸 평론가 김학렬(70)씨는 이렇게 말했다. 교토에서 태어난 총련계 동포로서 조선대와 와세다대에서 가르치며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문예동)의 부위원장이기도 한 김씨는 일찍부터 문학에 눈을 떠 일본어로 시와 소설을 열심히 썼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윤동주의 〈서시〉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서시〉 중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이 저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어쩐지 그 구절을 읽고 나니, ‘죽어가는 조선(한국)어를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부터 조선(한국)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회성, 이양지, 유미리 등 우리에게 알려진 일본의 동포 문인들은 대부분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문예동을 중심으로 한 총련계 동포 문인들은 어디까지나 모국어를 고집하고 있다. 김씨의 모국 방문은 국내의 한 대학에서 주관하는 학술회의에서 문예동을 비롯한 재일 조선어문학의 존재와 의의를 발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죽어가는’ 것이 한국어만은 아니겠지만, 김씨를 비롯한 문예동의 동포 문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윤동주의 〈서시〉를 가장 충실히 읽고 소화한 이들이 아닌가 싶다.
“일본에서 오래 살다 보면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로 일본 내 삶의 어려움을 토로한 김씨는 “윤동주가 형무소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실증적으로 밝히는 것도 문학적 평가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며 연구자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일본에서 오래 살다 보면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로 일본 내 삶의 어려움을 토로한 김씨는 “윤동주가 형무소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실증적으로 밝히는 것도 문학적 평가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며 연구자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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