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4.27 22:01
수정 : 2006.04.2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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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주/포항공과대 교수·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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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만난 사회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 여성 총리가 탄생한 시대에 살고 있다. 여성 총리 탄생 은 그간 많은 선배들이 길을 닦아놓은 덕분이리라.
업적의 비교가 나름대로 뚜렷한 과학계에도 여성차별은 있었다. 수학자 에밀 뇌터(Emmy Noether)는 20세기의 최고의 여성수학자로 순수 수학 영역뿐 아니라 물리학에서의 엄청난 공헌으로 물리학자들한테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수학자로 알려져 있다. 장례식 때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참석해 애도하며 업적을 칭송한 것을 보더라도 이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학자로 인정받기까지 여성이기 때문에 많은 역경을 겪어야 했다. 그는 수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18살이 돼서야 수학에 관심을 기울인 늦둥이 수학자였다. 여성들에게 대학 입학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인 1900년도에 그는 청강생으로 시작하여 박사학위를 마친다. 박사 학위 뒤 그는 독자적으로 당대 최고 수학자였던 힐버트(Hilbert)의 연구와 관련된 중요 논문들을 발표하면서 수학자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해 힐버트가 있었던 독일 괴팅겐대학에 초청받게 된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힐버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학자였던 아버지와 힐버트의 이름을 빌려 보수 없는 강의를 시작해야 했다. 당시 대학의 보수성에 대해선 “대학은 목욕탕이 아니다”(즉 목욕탕처럼 남녀를 구별해선 안된다는 뜻)라고 힐버트가 항변했다는 일화가 있다.
1차 세계대전 후 여성의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뇌터는 자기 이름으로 강의를 개설하여 약간의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가 괴팅겐 대학에 정착한 이후 현대 대수의 근간을 이루는 많은 주요한 연구논문들이 발표돼 세계수학자대회 초청강연 및 우수연구 논문상 수상 등 그의 업적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무렵 독일에서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이 시작돼 유대인이었던 뇌터는 미국행을 결행했으나 필라델피아에 있는 여자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돌연 죽음을 맞게 된다. 이를 애석하게 여긴 아인슈타인이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글을 <뉴욕타임스>에 싣기도 했다. 결국 뇌터는 남성들의 독무대였던 독일 수학계에서 여성이었기에 겪었던 많은 시련과 난관을 극복해 내고 20세기의 위대한 수학자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는 물론 뛰어난 업적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런 난관을 극복할 수 있도록 그를 인정하고 응원해준 몇몇 동료 수학자의 믿음과 노력도 간과할 수 없겠다.
미국의 여성수학협회는 매년 수학계에 뛰어난 공헌을 한 여성 수학자를 초청해 ‘에미 뇌터 강좌’란 이름으로 대중 강연을 열어 그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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