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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18 17:23 수정 : 2005.02.18 17:23

낮추고 사는 즐거움

‘여성노동자 대모’조회순 목사
봉평살이 10년 생명일기 모음
풀 한포기에서 평등을 배우고
돼지감자에서 연대 힘 깨달아

머리가 하얗고 얼굴이 동그란 할머니가 강원도 평창 봉평에 있는 태기산 중턱으로 살러갔다. 1996년,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됐던, 이효석의 고향인 그 태기산 750m 고지에 예순두살 할머니가 혼자 흙집 짓고 터를 잡았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와도 친구가 되는 삶, 해 뜨는 시간에 일어나 날 저물면 잠드는 삶을 시작한 지 10년. 굳이 스스로 변하자고 맘먹지 않았는데 자연이 그를 바꿔나갔다. 마치 할머니가 오기를 알고 기다렸다는 듯이. 할머니 하얀 머리는 겨울눈처럼 새하얘지는데 얼굴에 도는 생기는 봄꽃처럼 발개졌다.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한 할머니는 절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자연속에서 깨달은 ‘생명’이란 것이 할머니 몸을 부추겨서 추는 ‘생명의 춤’이다.

그 할머니 조화순(71) 목사가 태기산에 깃들게 된 것은 목사직에서 은퇴한 것이 계기였다. 엄혹했던 박정희 정권 시절, ‘여성노동자들의 대모’로 불리며 노동자들을 보살피며 함께 싸웠던 감리교 인천산업선교회 조화순 목사, 고은 시인이 <이땅의 두려운 시악씨인저>란 시를 지어 “썩어 문드러진 이 땅의 수많은 사내들에게 가장 두려운 시악씨인저 아 조화순 목사”라고 노래한 그 조화순 목사다. 권익을 찾으려다 ‘인분 테러’를 당했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동지로 옥고까지 치렀던 조 목사는 18년을 노동운동에 바친 뒤 목회 현장으로 돌아가 농촌교회에서 10여년 동안 지역사회 발전에 힘쏟다가 은퇴했다. 평생 목사 일을 했음에도 변변한 집 하나 마련하지 못한 채. 떠날 때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은퇴한 조 목사에게 농촌에서 유기농 환경운동을 벌이던 한 목사가 함께 있자고 연락해왔다. 40년전 노동운동과 운명적으로 조우했던 그 때처럼 갑작스럽지만 조 목사는 미리 정해진듯 자연스럽게 봉평으로 향했다. 평생 그랬듯 머리가 시키는대로가 아니라 가슴이 시키는대로 따랐을 뿐이었다.

이 책 <낮추고 사는 즐거움>은 조 목사가 그렇게 메밀꽃 고장 봉평에 정착해 10년을 살아온 이야기, 10년 동안 생각하고 깨닫게 된 이야기 모음이다. 일체의 꾸밈이라곤 없는 담백한 글로 조 목사는 담채화처럼 투명하게 자기의 삶 그대로를 보여준다. 그 삶은 역시 평생 그가 옳다고 믿는대로 실천에 옮겼던 운동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섰던 예수처럼 살지는 못해도 목회자로서 그 흉내는 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 곁에 머물렀던 것이 그에게 있어 ‘운동’이라면 운동이었다. 그가 스스로 찾은 자기 운동의 종착점은, 그리고 진정 하고팠던 일은 땅의 문제, 환경의 문제로 결론지어졌다. 그러니 당연히 농촌에서 농사짓고, 농민들과 이야기 할 노릇이었다. 어릴 적 <상록수> 채영신처럼 농촌계몽운동을 하고팠던 그가 농촌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50년이 걸렸다.

남을 돕고픈 마음, 같이 살고픈 마음에 그가 먼저 찾아가지만 조 목사는 결코 가르치지않고 배울 따름이다.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그랬듯 남을 계몽하는 것이 스스로 계몽당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공단에서는 노동자들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배웠고 이제 태기산에서는 농촌에게, 자연에게 배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평등, 남녀 평등만이 아니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포기도 모두 인간의 생명과 마찬가지”이므로 뭇 생명이 평등한 ‘생명의 평등’을 덧붙여야 하는 것을 배운다. 돼지감자가 빨리 자라니 잡초가 힘을 못쓰는 모습에서는 세상의 선과 악을 놓고 악을 제거하는 것만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선을 모아 연대하면 악이 힘을 못쓰게 되는 ‘연대’의 가르침을 받는다.

자연이 사계절 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한결같다. “언제나 사랑을 잊지 말아라”는 한마디다. 사랑을 잊지 않았기에 봄이면 다시 꽃이 피고 여름이면 수많은 초록이파리가 우리와 만나는 것이며, 해마다 다시 태어나는 풀잎이 초록 청춘이듯 포기하지 않고 시작하는 그 모든 것들이 청춘이다. 자연이 들려준 그 이야기를 조 목사는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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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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