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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11 18:44 수정 : 2006.05.12 17:15

메타피지컬 클럽
루이스 멘넌드 지음. 정주연 옮김
민음사 펴냄. 2만2000원

오늘날 미국 만든 프래그머티즘 산실 ‘메타피지컬 클럽’
윌리엄 제임스·올리버 홈스·찰스 퍼스·존 듀이
남북전쟁에 쓸려간 ‘지성’ 복구하려 반세기 끙끙
네 거인의 삶과 학문으로 현대 미국사 엮어

1856년 캔자스 포타와토미에서 존 브라운이라는 백인 남자가 다섯 명의 노예제 지지자를 납치해 단검으로 그들의 두개골을 쪼갰다. 59년 10월에 브라운은 버지니아 하퍼스페리에서 21명으로 구성된 무장부대로 남부지역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해 12월 그가 붙잡혀 처형당하자 북부는 그를 순교자요 성인으로 떠받들었다.

그 10년 전인 1846년 10월 비교해부학 및 고생물학 창시자 퀴비에, 자연지리학의 시조 훔볼트 등과 사귀며 유럽에서 큰 성공을 거둔 반다윈주의 자연과학자 루이 애거시가 미국에 도착했다. 그해 필라델피아에서 난생 처음 흑인을 본 애거시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이 퇴화하고 타락한 인종을 보고… 그들이 나에게 음식을 건네주려고 흉측한 손을 내밀었을 때에는 이런 자들의 시중을 받느니 빵 한 조각이라도 멀리 떨어져서 먹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흑인들과 이렇게 가까이 있어야 하는 백인들은 얼마나 불행한가! 신이시여 우리가 이들과 가까이 있지 않게 하소서!”

애거시는 당대 가장 유명한 미국 인류학자 새뮤얼 조지 모턴과 자주 어울렸다. 모턴은 1849년에 출간한 책에서 인종별 뇌 용적을 백인, 몽골인, 말레이인, 아메리카 원주민, 흑인순이라 열거하고, 백인종이 “최고의 지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며 사하라 이남 흑인들 뇌 용적이 3천년 전의 백인 뇌 용적과 같다는 걸 증명하려 자료까지 조작하며 애썼다.

남북전쟁이 터진 다음해인 1862년 4월 나중에 유명한 하버드 지질학자가 된 너새니얼 셰일러라는 하버드 로렌스과학학교(애거시가 창설공신이다) 학생이 애거시를 우연히 만났을 때 그는 울고 있었다. 이유를 묻자 “그들이 이 나라를 멕시코처럼 만들 것”이라고 대답했다. 노예제 폐지론자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흑인해방과 흑백 혼혈로 나라꼴이 스페인계 백인과 원주민 및 흑인과의 혼혈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 멕시코처럼 파멸(!)할까봐 공포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앞서 남북전쟁 발발 다섯 달 뒤인 1861년 9월 나중에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될 윌리엄 제임스가 열아홉살 나이로 과학학교에 입학하러 갔다가 처음 애거시를 만났다. 애거시는 1859년 출간된 이래 자신의 주장에 치명타를 안기고 있던 다윈의 <종의 기원>이 대표하는 진화론적 일원발생론을 뒤엎고 모든 생물이 창조주에 의해 처음부터 현상대로 계획되고 만들어졌다는 다원발생론의 증거를 찾기 위해 브라질 탐사를 떠났고 제임스도 거기에 동참했다.

남북전쟁 이후 새로운 나라 변모

강한 인종편견을 지녔던 반다윈주의 자연과학자 루이 애거시(왼쪽)와 그를 하버드대학에 끌어들인 벤저민 퍼스 하버드대 천문학 및 수학 퍼킨스좌 교수. ‘메타피지컬 그룹’의 일원이었던 찰스 샌더스는 벤저민 퍼스의 다섯 자녀 가운데 둘째였다. 민음사 제공
2002년 퓰리처상 수상작 <메타피지컬 클럽>(민음사 펴냄)은 이 윌리엄 제임스와 법학자 올리버 웬들 홈스, 논리학자이자 과학자이며 기호학 창시자인 찰스 샌더스 퍼스, 철학자요 교육학자인 존 듀이 등 남북전쟁 이후 반세기의 미국 지성사를 지배한 네 거인 얘기를 중심으로 미국현대사를 재구성한다. 다양한 이력과 철학의 소유자인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통분모는 그들이 실용주의로도 번역되는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창시자들이라는 점이다. 부제도 ‘오늘날의 미국을 만든 단 하나의 사상 프래그머티즘은 어떻게 탄생했는가’다.


하지만 이 책은 그들의 철학적 논의를 다룬 것이 아니라 ‘역사적 해석작업’이다. 따라서 딱딱하지 않다. 그들 4명에 관한 전기적 서술형식을 취하면서도 그들뿐만 아니라 부모와 형제 등 풍성한 가족 얘기, 그들 사이를 이어주는 에머슨, 다윈, 아가시 등 당대의 숱한 유·무명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들 사람얘기를 중심으로 전쟁과 정치, 과학과 철학, 인류학과 심리학, 종교와 교육, 법, 인종문제, 노동운동 등 다양한 주제들을 매우 구체적인 실증자료들을 토대로 정교하게 엮어 흥미진진하게 당대사정을 쫓아가는 재미가 있다.

‘메타피지컬 클럽’이란 메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의 윌리엄 제임스 서재에 모이곤 했던 젊은 지식인들, 말하자면 이 책의 주인공들이 자신들 모임에 “반은 비꼬는 의미로, 또 반은 반항적인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1872년 1월에 결성됐고 퍼스, 홈스 외에 세인트 존 그린, 존 피스크, 첸시 라이트, 프랜시스 엘링우드 애벗 등이 멤버였다. (물론 인종차별주의자 애거시 등 기성 가치의 대변자들은 이 클럽 멤버가 아니었으며, 제임스는 애거시의 과학학교 제자였으나 그의 사상적 후예는 아니었다.) 9개월 정도밖에 존속하지 않았지만 미국사를 바꿔놓은 프래그머티즘의 산실이었다.

모든 것은 남북전쟁(1861~65년)에서 시작됐다. 신무기와 전술 교체기에 일어나 엄청난 인명피해를 낳았던 그 전쟁 뒤 연방체제는 살아남았으나 미국은 거의 모든 면에서 새로운 나라가 됐다.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상흔을 남기는 전쟁들이 그렇듯 남북전쟁도 그 시대의 신념과 가설들을 의심하게 했다. 신념들은 미국이 전쟁으로 치닫는 것을 막지 못했고, 그래서 그것들은 전후의 새로운 세계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것처럼 보였다. 남북전쟁은 남부에서 노예제 문명을 쓸어버렸지만 그와 함께 북부의 지적 문화 거의 전부가 쓸려나갔다. 미국이 그 문명을 대체할 문화를 계발하고, 사상들을 찾아내고, 사고방식을 확립하는 데에는 거의 반세기가 걸렸다. 그 발버둥이 바로 이 책의 주제다.”

인간의 상대성·오류가능성 인정

듀이 등 네 사람은 그 발버둥의 중심에 있었고 그들이 새로 짜낸 사상은 교육, 민주주의, 자유, 정의, 관용에 관한 미국인의 사고방식을 바꿔놓았다. 그들의 프래그머티즘은 관념적 진리 추구에 매달려온 유럽철학 전통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인간 이성의 상대성·우연성·오류 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우리가 전적으로 어떤 진리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다른 진리들이 사실일 가능성은 항상 있다. …우리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는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방식, 사실들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우리가 보여주었던 관용에서 기인한다. 양자택일은 폭력이다, 프래그머티즘은 사람들의 신념이 쉽게 폭력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었다.”

2차대전 뒤 양자택일식 냉전 이데올로기가 판치면서 빛을 잃었던 프래그머티즘은 냉전 붕괴와 함께 적어도 반대입장을 경청하는 관용과 다양성 측면에서 부활의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네오콘 등장, 테러와의 전쟁이 상징하는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우리 편 아니면 적’식의 패권전략추구와 더불어 빛은 다시 꺼져가고 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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