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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11 20:18 수정 : 2006.05.12 17:16

한국 근대미술의 천재 화가 이인성
신수경 지음
아트북스 펴냄, 1만1000원

가난으로 중학도 못간 천재소년화가
좋은 스승 만나 18살부터 조선미전 독차지
붓만 들면 상받는 ‘귀재’로 일본까지 명성
39살 요절로 ‘관전작가’ 편견에 묻혔다
‘이야기 많은 그림’에 끌린 저자 열정으로 ‘부활’

‘저녁 6시. 두 남자가 다방에 들어 왔다. 그 때 갑자기 한 남자가 품에서 칼을 꺼내더니 벽에 걸린 작품을 북 찢어 버렸다.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음 순간, 축음기 앞에 서 있던 다방 주인이 칼을 든 남자에게 달려 들어 빼앗은 칼로 그의 얼굴을 찔렀다.’ 1937년 10월 28일. 대구의 아르스 다방에서 일어난 일이다. 칼을 든 남자는 누구이며 왜 그림에 칼질을 한 것일까?

장안 뒤집은 ‘광팬’의 그림 칼질 사건

경찰 조사 결과, 그 날 칼을 휘두른 남자는 다방 주인의 보통학교 동문이었고, 다방 주인은 화가 이인성이었다. 이인성은 마라톤 선수 손기정, 무용가 최승희와 더불어 1930년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신문 기사는 ‘조선의 보물’이니 ‘화단의 중진’이니 하면서 이인성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그의 그림이 칼질 당한 37년에 이인성은 조선미전에서 내리 6회 특선을 차지해 추천작가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 날 찢겨진 그림은, 이인성이 추천작가가 되어 조선미전에 무감사로 출품한 <한정>이라는 작품이었다. 당시 이인성의 나이는 겨우 스물 여섯(동양화부의 추천작가였던 김은호의 나이가 마흔 다섯이었다). 열여덟 살부터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입상을 한 결과 얻은 영예였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단한 화가였다. 그런데 이인성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 그의 그림을 찢어버린 것이다.

12년 대구의 가난한 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인성은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아들이 ‘천한 환쟁이’가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아버지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서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보통학교 시절, 개벽사가 주최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해 신문마다 ‘천재 소년 화가’라고 떠들썩하게 추켜세워도 식구들한테는 그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다. 졸업 뒤 소년은 집안 사정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 특선작으로 이인성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가을 어느날>. 조선의 향토색을 가장 잘 표현한 근대작가로 꼽히는 그의 색감과 폴 고갱의 영향 등을 엿보게 한다.
스승과 대구 유지들 후원으로 유학

그 때 소년의 재주를 눈여겨 본 수채화가 서동진의 권유로 일을 하면서 수채화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과, 천재 소년을 키우려는 스승의 지도로 이인성은 18살이 되던 29년 조선미전에 첫번째 입선을 했고, 2년 뒤에는 스무살 나이로 특선을 차지했다. 그야말로 천재 소년 화가의 소문이 기정 사실화 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그림에 천재적인 솜씨를 나타내자 대구 지역 유지들이 이인성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처음 특선을 하던 그 해에 이인성은 그의 재주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곳에서 일을 하면서 다이헤이요미술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일본 유학시절에 그는 해마다 조선미전에 출품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에서 개최하는 광풍회전과 제국미술원전람회, 일본수채화회전 등에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여 상을 받았다. 그야말로 붓만 들었다 하면 상 받을 작품이 완성되었다.

일본 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다시 대구에 돌아온 그는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면서 이인성양화연구소를 열어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바로 이때가 인생의 황금기였다. 유학시절에 만난 디자인 전공의 신여성 김옥순과 고향에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면서 자신의 원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었다. 더 이상 가난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 때 순수 예술인들의 모임 장소로 만든 곳이 바로 아르스 다방이었다. 아르스는 예술인들이 차를 마시고 토론도 할 수 있는 살롱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을 다방 안에 걸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파란 배경의 자화상>(왼쪽), <모자를 쓴 자화상>(오른쪽). 모두 눈을 감고 있는 이유가 암울한 식민지 상황에서 현상을 바라보지 않겠다는 의도인지 내면의 갈등을 보여 주는 것인지 해석이 엇갈린다.
그 날 이인성의 다방에 와서 그의 작품에 칼질을 한 ‘범인’은 이인성의 그림을 무척 사랑하고 좋아해서 그에 관한 각종 신문 기사와 그림을 모아서 스크랩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 문부성미술전람회의 목록을 보니까 당연히 들어 있을 줄 알았던 이인성의 이름이 보이지 않자 그가 그림에 더욱 정진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기 위해서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 사건은, 그의 진심을 알게 된 이인성이 그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조금 빗나간 애정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당시 연예인도 아닌 이인성에게 이런 광적인 팬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나 하는 것을 반증해주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방 이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갔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가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것에 비해 이인성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일제시대 관전인 조선미전에서 자란 전형적인 작가”라는 편견 때문이었고, 그 편견을 불식시킬 시간적인 여유도 없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미전에서 가장 화려하게 각광을 받았던 천재화가는 세 번의 결혼과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 인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사라져갔다. (이인성은 50년 11월 경찰과 사소한 시비 끝에 총에 맞아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1950년 전란중 어이없는 총격사망

그런데 오늘 그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림에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이인성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는 한 미술사가의 집요한 노력으로 오늘 그의 생애가 생생하게 복원되었다. 유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철저한 자료조사가 바탕이 된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이인성이라는 거장을 만날 수 있다. 그림으로 한 시대를 충실히 살았지만, 전쟁 직후의 혼란스런 상황에서 서른 아홉의 나이로 목숨을 잃은 천재화가의 작품 세계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세대를 위한 우리 미술가 시리즈로 첫 번째 나온 이 책은, 작가가 가슴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조정육/미술평론가·<거침없는 그리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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