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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박민정, 명정, 김연정 연구원, 조영수 교수, 강명희 연구원, 김정회 교수, 이미화, 이진금 연구원. 사진 경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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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지 않은 어린이책’ 출판 거절당하자 아예 학내에 차려
1년간 5권 예상밖 선전…출판도 배우는 독문과 “전과 안해요”
이 출판사는 간판도 사무실도 없다. 굳이 찾아가려면 과 사무실로 가시라. 거기서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면 분명 사원 중 한명일 터다. 교수와 연구원이 사원인 출판사. 경기대 독문과. 줄여서 경독. 그대로 출판사 이름이다. 전화(032-614-9145)라도 할라치면 강의실, 캠퍼스 때로는 시끄러운 전철 안이다. 착신을 한 손전화로 모아둔 탓이다.
아동·청소년 문학연구실 모태
“돈보다는 시장에서 상업적으로 외면당하는 좋은 책을 내고 싶었습니다.” 대표 명정(35)씨의 말이다.
2004년 11월 교수 셋, 연구원 열명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3500만원을 씨돈으로 설립한 경독은 1995년 출범한 아동·청소년문학연구실이 모태다. 10여년동안 독일의 아동·청소년 문학작품 30여권을 기획·번역해온 터. 외부의 출판사를 통하자니 제약이 많았다. 특히 청소년 문제를 다룬, ‘괜찮은’ 내용의 책도 한국에서는 때가 이르다, 묘사가 적나라하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당한 적이 많다. 아예 출판사를 차려버려?
그들을 두고 주위사람들은 “나무칼을 들고 전장에 뛰어든 꼴”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어설프고 위험해 보였던 것. 1년동안 <나에게도 친구가 생겼어요> <엄마 잃은 아기여우> <우리누나는 다운 증후군> <사자가 도망쳤어요> <1999년생> 등 5권의 책을 냈다. 친구만들기, 입양, 생명공학, 다운증후군 등 ‘예쁜 어린이책’이 눈길을 주지 않는 것들이다. 처음에는 겁없이 초판 3000부를 찍다가 요즘은 1000~1500부를 찍을 만큼 꾀도 생겼다. 영업사원이 따로 없지만 시장반응은 좋아 꾸준히 나간다는 자랑이다. 특히 한 아이의 출생비밀을 추적해가는 식으로 생명복제 문제를 다룬 <1999년생>은 어린이도서연구회의 추천으로 전국 중학교 도서관 81곳에 들어갔다. 다음 책들 역시 생활동화. 친구 만드는 곰, 피 대신 시금치를 먹은 뱀파이어, 남자같은 공주 그리고 어린이 유괴를 다룬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말라> 등.
경독의 탄생에는 또다른 배경이 있다. 자칫 없어질 위기에 놓인 독문학과를 수호하기 위한 것.
한솥밥 먹으며 번역료는 적립
1997년부터 과별 아닌 학부제로 학생들을 모집하게 되면서 지원자가 없으면 학과가 없어질 수도 있게 되었다. 이미 없어진 학교도 있고 교양학부 강좌로 흔적만 남은 곳도 있다. 불문과와 함께 유럽어문학부에 속한 독문과는 학부제 변경 이후에도 꾸준히 20명 이상의 지원자를 받아왔다. 일단 과를 선택한 학생들도 전과가 거의 없다. 아동·청소년문학연구실 연구원이자 경독 기획팀장인 강명희(36)씨는 연구실과 출판사가 독문과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문과에 들어오면 독일문학뿐 아니라 번역, 기획, 출판실무 등을 배울 수 있는 거죠. 후배들이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게끔 하고 있어요.” 강 팀장은 경독을 ‘명품을 지향하는 구멍가게’라고 자평했다. 다른 대학, 다른 과에서 부러운 시선으로 본다.
공부도 한곳에서, 밥도 한솥밥. 무보수 일에다 번역료도 그대로 적립한다. 나중에 주식으로 전환할 예정이다. 종교집단 같다는 말을 듣지만 앞으로 들어오는 후배들을 위해 기꺼이 징검다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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