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5.18 21:06
수정 : 2006.05.1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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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크샤-환각의 문화사회사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양준·김희선 옮김
싸이북스 펴냄.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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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평생 ‘환각제’ 연구 몰두한 소설가 헉슬리
약물중독은 ‘친숙한 나’와 달라지고 싶은 갈망 때문
‘약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약’ 하느냐를 선택할 뿐
‘모크샤’는 산스크리트어로 해방(또는 해탈)을 뜻한다. <멋진 신세계>의 영국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1894~1963)가 말년에 쓴 소설 <섬>에 나오는 가상의 섬의 주민들은 ‘모크샤’라는 환각제를 복용한다. 이를 통해 정신이 고양되는 신비한 경험을 한다. 그렇다고 현실도피를 추구하지도 않으며 그 약에 중독되지도 않는다. 섬의 젊은이들에게 약을 주는 의례를 할 때 인도자가 말한다. “해방이란… 슬픔의 끝. 무지했던 자신의 과거에서 벗어나 참된 자신이 돼가는 것이다. 잠시나마 모크샤 덕분에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실제 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섬>은 헉슬리가 반평생 이상을 몰두했던 연구의 결과를 쏟아부은 역작이었다. 그 연구는 인간을 해방으로 이끌 환각제에 대한 탐색이다. 헉슬리는 아버지, 형제들 가운데 천재 과학자가 수두룩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그 스스로도 대문호가 됐다. 약물 중독자가 아니었고, 중독성 약물은 물론 알코올 중독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계의 발언을 해왔다. 그런 그가 왜 환각제에 관심을 가진 걸까.
<모크샤 - 환각의 문화사회사>는 헉슬리가 37살이던 1931년부터 죽기 직전까지 이 주제를 가지고 쓴 글과 연설문, 편지들을 모아 77년에 발간된 <모크샤>를 번역한 것이다. 책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그의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그 애정은 60년대 반전 세대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요절한 짐 모리슨이 이끌었던 록밴드 ‘도어스’의 명칭은 이 책에 실린 그의 54년 글 ‘인식의 문: 도어스 오브 퍼셉션’에서 따온 것이다.)
“인간은 농부 이전에 약물 중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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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부터 페요테 선인장에서 추출한 메스칼린과 엘에스디(LSD)를 몇차례 경험한 헉슬리는 ‘다른 세계’의 모든 것을 ‘환각 체험’이라는 강연문에 정리했고, 그가 죽기 직전까지 이 주제를 가지고 쓴 글과 연설문, 편지들을 모아 발간한 책이 ‘모크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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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실린 헉슬리의 글들은 환각과 환각제의 역사, 그 문화적·사회적 의미, 정신 질환 등을 두루 아우른다. 헉슬리에 따르면 인간은 “농부이기 이전에 약물중독자”였다. 문명 이전부터 인간이 진정제, 도취제, 환각제 등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인간에게 자아 초월 충동, 너무 친숙한 ‘나’와 다른 어떤 것이 되고 싶은 갈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신적 변화를 일으키는 약물을 끊임 없이 찾아왔다고 헉슬리는 말한다. 자기 초월의 맥락에서 알코올을 설명할 때 표현이 따뜻하다. “단지 타락해서 인간이 술을 좇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문맹인 이들을 알코올은 문학과 심포니 콘서트가 열리는 곳으로 데려갑니다.” 그러나 알코올에 의존한 초월은 “짧게 사라질, 독으로 전락하고 말 한 순간의 연기”라는 지적도 빠뜨리지 않는다.
헉슬리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아편은 인민의 종교다”로 바꾼다. 믿음에 의해서든, 약물에 의해서든, 수련에 의해서든 정신 변화는 인간이 의지로 얻을 수 있는 것 가운데 최선의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택은 약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약을 할 것이냐가 돼야 한다고 헉슬리는 말한다. 신체에 해가 없으면서 자유롭게 초월의 효과를 가져다주는 약. 헉슬리는 멕시코 페요테 선인장을 그 예로 들면서 리세그르산(LSD-25)을 비교적 거기에 가까운 환각제로 꼽는다.(대마초에 대해서는 조금 유보적이다. 대마초가 페요테보다 ‘무해함이 덜하다’고 하면서도 대마초가 사회나 복용자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1944년 뉴욕시에서 행한 연구결과를 인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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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슬리가 ‘환각제’로 쓴 메스칼린의 분자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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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슬리가 말하는 초월은 인간의 정신 속의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다. 그 세계는 평소에 자각하는 의식의 세계와 전혀 달라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개인의 기억과도 무관하며 심리학자 융이 말하는 원형적 세계와도 또 다르다. 거기서 발견되는 형상들은 여러 민족의 설화나 종교에서 나타나는 형상과도 유사하다.
53년부터 페요테 선인장에서 추출한 메스칼린과 LSD를 몇 차례 경험한 헉슬리는 이 ‘다른 세계’의 모든 것을 ‘환각 체험’(32장)이라는 강연문에 정리한다. 거칠게 요약하면 ‘다른 세계’는 “우주가 무사하다는 느낌”, “주체화·객체화가 이뤄지지 않는 합일된 사랑”, “강렬한 미와 강렬한 진실이 동시에 드러나는” 경험을 줘 무한한 고양감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것이다.(이 ‘다른 세계’는 불교의 열반의 경지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헉슬리 스스로는 선을 긋고 있는 듯하다. “사랑과 동정심으로부터 분리된 열반은 지옥의 고통만큼 끔찍한 것”이라는 식의 표현이 여러차례 나온다.)
“아편은 인민의 종교다”
이 ‘다른 세계’를 윌리엄 블레이크, 조지 러셀 같은 시인들은 선천적 능력으로 자주 왕래했으며, 보통 사람들은 어릴 때 잠깐 왕래할 수 있다고 헉슬리는 말한다. 그러나 분석적이고 개념적인 교육체계 속에서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점차 상실돼, 지금 이 세계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인체에 무해한 환각제를, ‘다른 세계’와 왕래할 수 있는 다리로 간주했고, 그와 뜻을 같이 했던 약학자, 정신과 의사 등이 여러 재단에 연구기금 출연을 요청하기도 했다.
헉슬리의 말대로 환각제는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약제사를 도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도 있고, 독재자를 도와 우리를 노예로 만들 수도 있다. 그의 글에서 환각제보다 더 다가오는 건 그가 위로하려고 했던 ‘고통받는 정신’이다. “잃어버린 영혼들이, 그들이 살도록 운명지어진 우주를 - 때로는 아름답고 때때로 두려웠던 그러나 항상 인간과는 다른 것이었고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얻는 데 도움을” 주려고 애썼던.
임범 기자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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