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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18 21:33 수정 : 2006.05.19 16:49

기억의 일곱가지 죄악
대니얼 L. 샥터 지음. 박미자 옮김. 한승 펴냄. 1만5000원

기억은 분실·폐기·뒤섞임의 ‘생체도서관’
잊어버리거나 왜곡되거나 반복해서 떠오르거나
건망증으로 인한 빈자리에 좋은 생각 들어찰 수 있듯
“도움 주는 기능 위해 지불하는 대가”로 인식해야

도서관은 자료를 체계적으로 분류 저장하여 대출해 주는 것. 만일 빌릴 수 없다면 자료가 없어졌기 때문. 둔 곳을 모르거나 등록카드가 없어져도 못 빌려주기는 마찬가지. 엉키는 일도 있지 않을까. 등록카드와 자료가 일치하지 않아 엉뚱한 자료가 나올 수 있다. 또 엉뚱한 분류체계에 의해 자료가 재배열될 수도 있다. 사서에 따라 특정 주제가 부풀 수도 있고 급기야는 없던 자료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기억은 일종의 생체 도서관. 거기서도 도서관과 흡사한 일이 벌어진다. 망실, 뒤엉킴, 조작은 도서관보다 더하다. 워낙 깊고 복잡하기 때문. “추억은 아름다운 것. 고통스런 기억은 잊으려네. 그래, 웃어야지. 웃음만을 기억할 테야. 옛일 생각하면 떠오르는, 아름다운 그 추억. 아름다운 그 추억.” 1970년대 유행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노래 ‘The way we were’ 가사처럼 현재가 과거를 줄세우기도 한다.

<기억의 일곱가지 죄악>(한승 펴냄)은 하버드대 대니얼 L. 샥터 교수가 말하는 기억의 세계다. 인지심리학자 답게 신경과학, 인지과학, 임상경험을 내세워 고대의 일곱 죄악에 빗댄다. 그는 기억의 왜곡을 소멸, 정신없음, 막힘 등 누락으로 생기는 오류와 오귀인 피암시성, 편향, 지속성 등 작위에 의해 빚어지는 오류로 나눈다.

소멸(transience)=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윈다. 1878년 헤르만 에빙하우스는 시간-기억의 관계를 수치화했다. 스스로 무의미한 철자목록을 외운 뒤 9시간이 지나 점검해보니 60%를 잊어버렸다. 한달이 지나니 75%를 잊었다. 망각이 대부분 초기에 발생하고 서서히 감소한다는 결론. 하루 뒤의 기억은 말 그대로 기록에 가깝지만 일주일 뒤의 기억은 특수한 것은 떨어져나가고 일반적인 것이 남는다. 소멸을 줄이는 대표적인 방법은 시각적 심상기억술과 부호화. 대니얼 샥터(Daniel Schacter)를 기억하고 싶다면, 사자떼에 싸여(Daniel in the lion’s den) 숨고싶은 통나무집(shack)를 바라보는 식으로 상상하라.

정신없음(absent-mindedness)=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애초에 부호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거나 기억 속에 있지만 인출이 안 되는 것. 안경을 어디 두었는지 몰라 헤매거나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승용차 지붕에 얹은채 운전하기가 그 예다. 과거 상기에 실패하면 기억을 못 믿게 되지만 점심약속처럼 미래계획을 잊으면 사람을 못 믿게 된다. 포스트잇이나 다른 기억 보조기구를 활용하는 방법 외에 뾰족수가 없다. 한가닥 기댈 데가 있다면 인지공학자.

‘의도하지 않은 표절’은 오귀인 때문


살바도르 달리(1904∼89)의 <기억의 영속성> 일부(1931). 생체 도서관인 기억 속에서는 별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흐려지고, 없어지고, 뒤엉키고, 때로는 새로운 사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람직하지 않게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생존을 위한 자연스런 메커니즘이다.
막힘(blocking)=톡 튀어나올 것 같은데 입에서만 뱅뱅 도는…. 사람의 이름에서 흔하게 발생한다. 이름에는 그 사람의 특성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 만난 지 오랠수록, 나이가 들수록 심하다. 사람에 대한 개념적 정보와 발음 코드 사이의 연결선이 약해진 탓. 혀끝에서 맴도는 현상은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에서 잦다. 목표단어 사이에 끼어드는 ‘못생긴 자매’도 한몫을 한다. 어려서 성적 학대를 받은 경우 가해자가 가족 구성원일 때 일시적 망각이 흔하게 나타난다. 의존적 관계인 탓에 긍정적인 경험을 회상하면서 상처의 경험은 인출이 막힌다는 가설.

오귀인(misattribution)=어디서 본 듯함과 세세한 회상이 없는 상태가 겹쳐서 빚어지는 착각. 범죄 수사때 목격자 증언의 오류도 여기서 빚어진다. 늘어선 용의자를 모두 본 후에 범인을 지적하도록 하면 목격자는 비교적 용의자처럼 보이는 사람을 선택한다. 범인이 줄에 없을 때조차. 다른 사람의 저술이나 아이디어를 자신의 창작이라고 여기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타인한테서 온 자극이 기억을 활성화하는데 시간이 걸리는데, 그동안 자극의 출처를 잊게 되면서 ‘의도하지 않은 표절’이 생긴다.

피암시성(suggestibility)=지난 경험을 상기시킬 때 유도질문이나 추가설명, 암시로 인해 기억이 새로 생겨나는 현상. 기억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며 어린이들한테 특히 많이 발생한다. 연구 결과 어린이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니?”처럼 자유서술형 질문에 겪은 일을 정확하게 말한 반면 “어디에서 다쳤니?”처럼 더 구체적인 질문에는 부정확함이 급증했다. 즉 자유서술형 질문에 9%가 반응하고 구체질문에 49%가 반응했다. 처음에는 사건을 부정하던 어린이 가운데 58%가 반복질문 뒤에는 사건의 일부에 대한 자세한 기억이 만들어졌다.

편향(bias)=현재의 태도로 과거를 돌아볼 때 생기는 현상. 연인 또는 부부의 4년 전 느낌을 상기할 때 감정변화가 없는 커플은 5명 중 4명이, 감정이 바뀐 커플은 5명 중 1명만이 정확하게 회상했다. 이혼한 사람은 더 이상 행복한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실망만을 기억함으로써 과거를 덧칠한다. 화랑에서 두 작품을 두고 고심하던 사람이 다음날 포기한 그림보다 사가지고 온 그림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 자신을 좋게 그리고 유리하게 보는 방향으로 과거를 기억한다.

기억의 7가지 죄악은 일종의 ‘필요악’

지속성(persistence)=고통스런 정보나 사건들이 반복해서 떠오르는 것. 군대나 직장에서의 참담한 실수, 망쳤던 중요한 시험 등에 가위 눌린 적이 있을 터. 지은이는 메이저리그 투수였던 도니 무어가 홈런 한방으로 소속팀이 월드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자 이를 괴로워하다 자살한 예를 들어 지속성이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일곱 가지 죄악은 악덕일까 미덕일까. 지은이는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과정과 기능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며, 기억의 또 다른 적응적 특징의 부산물”이라고 본다.

옛 전화번호나 어제 주차했던 곳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나.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을 지속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유사 사건을 회피할 확률을 높여준다. 건망증 역시 그로 인해 생긴 기억의 여유가 또다른 좋은 생각을 떠올리게 할 수 있다. 세세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경험을 일반화하고 조직화하는 능력의 기본이 된다. 고정관념 편향도 그러한 일종이다. 그러니 그리 염려할 바 없다. 몸이 알아서 하나니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시라는 말씀.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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