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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18 22:21 수정 : 2006.05.19 16:51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성공회대 연구교수

포로감시 가장 추잡한 일에 강제동원돼
일본군 ‘조선인 전범’으로 몰린 이학래씨
일본선 보상 외면 조국에선 버림받고…
원통함 사무쳐 일본 상대로 한평생 투쟁
여든둘의 마직막 성묘 길을 동행했다

하얀꽃 피는 언덕

전라남도 보성군에 다녀왔다. 보성이란 곳은 내 어머니 본관이지만 친척이나 지인이 거기에 살고 있는 건 아니다. 말하자면 무연고 땅이다. 그 땅에 가볼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일본에 사는 동포 이학래씨의 성묘에 동참하게 돼 가보게 됐다. 이씨 가족이 대절한 버스에 편승해 광주에서 1시간 반, 봄날 시골길은 평온하고 아름다왔다. 이씨 가족 묘소는 낮은 언덕 사과밭에 있고 하얀 사과꽃이 사랑스럽게 피어 있었다.

친척도 아닌 사람의 성묘에 왜 따라간 것인가. 일은 일본의 우인 가마쿠라 히데야씨한테서 연락이 온 데서부터 시작됐다. “급히 한국에 가게 됐으니 재워줘”라는 당돌한 메일이 왔다. 가마쿠라씨는 텔레비전방송국 디렉터로, 나도 전에 몇차례 함께 일한 적이 있다.

그가 추적을 계속해온 테마들 가운데 옛 일본군의 조선인 BC급 전범문제가 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포로들에게 강제노동을 시켰다. 특히 타이-버마(미얀마)간에 건설을 서두른 태면철도 공사에서는 영양부실과 질병, 학대 등으로 “침목 하나에 사람 하나”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많은 희생자를 냈다. 공사에 사역당한 약 6만명의 연합군 포로들 가운데 약 1만2000명이 죽음에 내몰렸고, 강제동원당한 현지주민도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연합군은 종전 뒤 동남아시아 등 각지에서 전범재판을 열어 일본군 군인·군속 5700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 가운데 984명이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 처벌받은 사람은 일본인만이 아니었다. 일본군에게 동원당한 조선인이나 대만인도 처벌받았다. 조선인은 148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그 중 23명이 처형당했다. 그 대부분은 포로감시원이었다.

가마쿠라씨가 제작한 <조문상(趙文相)의 유서>(1991)는 싱가포르 창이 형무소에서 처형당한 조문상이라는 인물을 중심에 놓고 조선인 군속들의 가혹한 운명을 추적한 작품이다. 1942년 5월 일본 육군성은 조선 전국에서 포로감시원을 모집했다. 3000명의 조선인 청년이 부산에서 3개월의 맹훈련을 받은 뒤 전선으로 송출됐다. 조문상은 개성 출신의 기독교 신도였다. 경성제국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그는 ‘통역’일에 배운 영어실력을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배치된 곳은 포로수용소였다. 매일 아침 포로 점호를 하고 작업현장에 내보내는 일이 그의 임무였다. 포로들과 일상적으로 얼굴을 맞댄 조선인 군속들은 당연히 격심한 증오의 표적이 됐다.

조문상은 전범재판에서 무죄를 주장했으나 검찰관이 그가 기독교도인 점을 지적하며 “양심과 성서의 가르침에 충실했는가?”라고 추궁하자 “내 잘못을 인정한다, 죄값을 받겠다”고 진술했다.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설령 영혼만이라도 이 세상 어딘가에 떠돌고 싶다. 그게 안된다면 누군가의 생각속에라도 남고 싶다. 친구야, 동생아, 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사상을 가지도록 해라. 지금 나는 죽음을 앞에 두고 내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기가 막힌다.”

대일본제국 신민으로 동원당한 그들은 조선인임에도 ‘일본인’으로서 문책당하고 처벌받았다. 사형을 면한 조선인 전범은 조국이 아니라 일본의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됐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일본 정부는 일본인 전범에 대해서는 국가보상을 해왔으나 일본국적을 상실한 조선인 전범들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보상 대상에서 빼버렸다. 식민지 신민을 마음대로 전쟁에 이용하고, 포로감시라는 가장 추잡한 일을 시켜놓고는 전쟁이 끝난 뒤엔 아무렇지도 않게 내버리는 일본이라는 국가. 이학래씨는 과거 반세기 동안 이런 일본이라는 국가의 기만성을 고발하고 맞서싸워온 인물이다.


보성 우체국에 근무하고 있던 이씨는 “마을에서 두 사람을 내놔라”는 “상부의 압력”도 있고 해서 포로감시원 모집에 응모했다. 전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결국 징역 20년형으로 감형돼 1951년 8월 싱가포르에서 일본 스가모로 이송됐다. 그때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에서는 조선(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1956년 이씨를 비롯한 조선인 전범들은 석방됐으나 일본 정부로부터는 한푼도 지원받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우리는 고향에선 ‘일제(부일) 협력자’로 돼 있습니다. 한번이라도 일본군에 협력한 자는 고국에겐 배신자가 되고 가족에겐 두번 다시 돌아오지 말았으면 싶은 죽은 자인 겁니다. …정직하게 얘기하자면요, 아무리 우리가 반강제적으로 징용당해 일본군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면책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에도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해서 목숨을 잃은 동포들이 분명히 있었으니까요.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정말 괴롭습니다. 그 한편으로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전범으로 몰렸는지, 고통스러워하며 처형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내 인생은 처형당한 23명 우인들의 원통함을 씻고 그들의 얘기를 전하는 몫으로만 남았습니다.”

이학래씨 등 조선인 전범들은 한데 뭉쳐 택시회사를 세우고, 일본국적으로 귀화하는 것도 거부한 채 고통스런 인생을 살아왔다. 고령의 전범들은 하나하나 세상을 떠나고 있지만 그들이 생애를 걸고 일본이란 국가에 요구해온 조선인·대만인 등 옛 식민지 출신 전범들에 대한 보상법은 아직도 제정될 기미가 없다.

가마쿠라씨가 보낸 메일에는 그 이씨가 성묘하러 귀향한다고 씌어 있었다. “이씨는 올해 82살. 아무래도 생애 마지막 성묘가 될 것 같기에 우리도 동행한다”라고. 그것은 텔레비전방송국의 공식적인 업무는 아니었다. 따라서 가마쿠라씨도 카메라맨 나카노 히데요씨, 음성담당 시바 히로모토씨도 모두 자비로 온 것이다. 나는 기꺼이 내 집을 그들의 숙소로 제공하고 나도 그 성묘에 동행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성묘를 마친 날 저녁에 광주에 사는 이학래씨 친척분이 불쑥 한마디했다. “그는 당시 18살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만큼 일제 황민화사상이 내면까지 침투해 있었던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그야말로 피해자 아닙니까. 그에게 황민화사상을 주입하고 전장에 내보낸 자들이야말로 죄가 더 무겁겠지요.”하고 내가 말하자, 친척은 목청을 낮추며 대답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여기엔 그걸 이해해 줄 사람이 거의 없어요.”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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