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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25 21:06 수정 : 2006.05.26 17:27

천승기/중동고등학교 교사

나는 이렇게 읽었다/그리스인 조르바

30년 전 이맘때 내가 다니던 대학에도 아카시아 꽃내음이 진동했었다. 우리 집은 가난한 마을 농부의 아들로 어렵게 대학을 다니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나의 책 읽기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못했다. 지금은 어디나 책이 넘쳐나지만, 당시 시골의 독서 환경은 열악했다.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학교엔 도서관이 없었고 쪼들리는 우리 집 사정으로 책이라곤 ‘교과서’뿐이었던 슬픈 추억이 있다. 사실 수업을 마치면 공부는 제쳐놓고 또래 여자친구들과 놀기에 바쁘기도 했다. 내가 처음으로 교과서가 아닌 책다운 책을 구입한 것은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이었다. 그것도 100권 가운데 10권. 갓 들어간 대학 신문사의 견습기자 급료를 털어 월부로 산 청록색 양장본 세로쓰기였다. 그 책은 빛이 바랬지만 아직도 책장에 남아 애지중지 나의 사랑을 받고 있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 10권 가운데 한 권이었다.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화자인 나와 조르바가 우연히 만나, 크레타섬에서 함께 갈탄광 사업을 하다 망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작품이 시사하는 바는 줄거리에 있지 않다.

‘나’는 상당한 지식을 갖춘 엘리트이다. 지식인이기에 여자를 다룰 줄도 모르고, 종이와 잉크밖에 친한 게 없다. 갈탄광 사업은 조르바에게 맡겨 놓고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업은 조르바를 연결시켜 주는 매개일 뿐 나의 모든 관심은 조르바와의 대화에 쏠려 있다. 이에 비해 조르바는 안 해 본 일이라고는 없이 산전수전 다 겪어 영화배우 안소니 퀸처럼 거칠고 투박한 인간이다. 도자기를 만드는데 걸리적거린다면서 새끼손가락을 자르기도 하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자만 보면 미쳐서 날뛰는 야성적인 남자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책을 읽는 재미에 푹 빠지는 작품이다. 조르바는 현실적이고 매력적인 남자로 다가오고, 그의 말은 구구절절 명언으로 남는다. 소설책에 밑줄을 그어 가며 읽었다면, 남들은 이해할지 모르겠다.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철학은 인생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실존인물을 모델로 한 조르바를 통해서 카잔차키스는 말한다. 현재의 순간을 중시하고 순간에 존재하기를 택하라고.

“앞날이 걱정된다고 했소? 난 어제 일은 어제로 끝나오. 내일 일을 미리 생각하지도 않소. 나한테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뿐이오. 나는 늘 나에게 묻소. ‘자네 지금 뭐 하나?’ ‘자려고 하네.’ ‘그럼 잘 자게.’ ‘지금은 뭘 하는가?’ ‘일하고 있네.’ ‘열심히 하게.’ ‘지금은 뭘 하고 있나?’ ‘여자랑 키스하네.’ ‘잘 해 보게. 키스할 동안 다른 건 모두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자네와 그 여자밖에 없는 걸세. 실컷 키스하게.’

우리는 카잔차키스의 소설에서 현실과 밀접한 실제적인 가치를 발견한다. 진정한 행복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들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우리들의 육체와 영혼은 어떤 관계인가? ‘한 순간의 반짝임’에 지나지 않는 이 짧은 인생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영원불멸을 그리는 우리의 끝없는 갈증도 우리가 영원불멸하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생의 짧은 기간에 우리가 어떤 불멸의 것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다는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라고 작가는 말한다. 삶은 결코 손으로 만져질 만큼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는 꿈과 사랑, 죽음 등 우리가 부딪히고 넘어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다. 삶이 걱정된다면,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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