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5.26 19:20
수정 : 2006.05.26 19:20
한반도에서 건너간 후손들 추적한 ‘슬픈 열도’ 출간
기시 노부스케(1896~1987)는 일본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는 아베 신조 관방장관이 “나에겐 위대한 존재”라고 칭송한 인물이다. 기시는 군국주의 일본 시절 도조 히데키 밑에서 상공대신과 군수차관을 지내며 미국과의 전쟁준비 최일선에서 활약했고 그 때문에 패전 뒤 에이(A)급 전범으로 단죄받았으나 도조 등 7명이 처형당한 다음날 전격 석방돼 총리직까지 오르면서 냉전시대 미국의 일본 및 동아시아 정책에 적극 협력한 우익 정치인이다. 만주국 총무청 차장으로 군부 지도자 도조와 함께 3년여 동안 일제 괴뢰국 만주국을 주무른 뒤 본국으로 영전하면서 “만주국은 내가 그린 작품”이라고 떠벌렸던 인물이기도 하다. “쇼와(히로히토 ‘천황’)의 요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침략전쟁시대 일본 실력자 중의 실력자였다.
자위권 확대 외친 기시 노부스케
그가 전범 재활용으로 점령정책을 바꾼 미국 덕에 살아남아 총리직까지 오르면서 자신의 핵심적 정치 신조로 삼은 것은 ‘평화헌법’ 개정이었다. 자유당 입당 조건도 개헌이었고 입당한 뒤 헌법조사회 회장이 됐으며 총리가 되자마자 설치한 게 헌법조사회였다. 지금 일본 우익들이 추진하는 군대보유와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 일본으로의 변신을 위한 개헌공작의 시조가 바로 그이며, 미-일 안보조약 개정으로 지금의 미-일 동맹 초석을 놓은 이도 그다. 그를 움직인 신념은 결국 영광스런 대일본제국의 부활이었다. “일본의 자위권은 한국과 대만에까지 확장돼야 한다”고 한 발언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기시는 아베 장관의 외할아버지다.
이름 6번이나 바꾼 대중작가
기시의 친동생은 전후 역대 일본 총리들 가운데 최장 재임 기록을 남겼고, 노벨평화상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까지 탄 사토 에이사쿠(1901~1975)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가 최종타결될 당시 일본 총리가 그였다. 모두 총리가 된 그들 형제는 현대 일본의 토대를 쌓았고 한국과의 인연도 남다르다. 역사의 장난인지 악연인지.
<동아일보> 논설위원 김충식씨는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 심수관 14대로부터 최근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규슈 남단 가고시마에 사는 심수관 14대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사토 에이사쿠가 자신한테 직접 써주었다는 ‘묵이식지’(默而識之;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것은 다 알아주고 통한다)라는 액자 속 글씨를 가리키며 이런 얘기를 했다. “사토씨가 하는 말이 놀라웠어요. 나한테 ‘당신네는 일본에 온 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묻기에 400년 가까이 되었다고 했더니, ‘우리 가문은 그 후에 건너온 집안’이라는 거예요. (한)반도의 어느 고장에서 언제 왔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자기네 선조가 조선에서 건너와 야마구치에 정착했다는 얘기였지요.”
핏줄 드러내고 위선 고발한 이도
김충식씨가 발로 뛰며 써낸 〈슬픈 열도〉(효형출판 펴냄)는 ‘영원한 이방인 400년의 기록’이라는 부제대로 임진왜란을 전후해서부터 일제 때까지 강제로 또는 자진해서 일본 땅으로 건너가 나름대로 굵직한 흔적을 남긴 당사자나 그 후손들 10명의 발자취를 추적한다. 뒤틀린 한-일 관계 역사의 바닥 모를 비극성이 짙게 반영된 그들의 기구하고도 극적인 인생유전은 어떤 역사책보다도 일본, 한-일 관계,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깊은 상념에 잠기게 만든다.
이름을 여섯개나 갈아가며 철저히 자신의 핏줄을 속이고 산 일본 스타 대중작가 다치하라 세이슈(김윤규), 외무대신으로 일제 패전 처리 최일선에서 일본과 ‘천황을 구한 인물’ 도고 시게노리(박무덕), 영웅이 된 프로레슬러 역도산(김신락)처럼 일본인보다 더한 일본인으로 행세한 사람들에서부터 작가이자 한-일 고대사를 바꾼 역사가 김달수, 외국인으로 일본 최고의 문학상 아쿠타가와상을 처음으로 받은 이회성처럼 차별의 참담한 고통속에서도 당당하게 핏줄을 드러내고 싸움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고 일본 사회의 위선을 고발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의 다양한 삶들을 중심으로 한 논픽션이 주는 재미와 감동은 묵직하고 흡인력이 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들어보는 면암 최익현, 김옥균, 이진영, 심수관, 이삼평에 관한 얘기는 또 얼마나 색다른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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