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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01 21:45 수정 : 2006.06.02 16:47

남선호/영화감독

나는 이렇게 읽었다/안나 카레니나

바람 한 점 없이 눈부시게 파란 하늘 아래 두텁게 얼어붙은 흰 눈, 사방 어디에도 하얀 뱃살을 드러내며 늘어선 자작나무뿐이고 대기조차 얼어붙어 손으로 만지면 쨍하고 소리를 내며 깨질 것 같은 러시아의 겨울. 내가 실제로 이러한 풍경을 경험한 적이 있던가? 왜 자꾸만 기억처럼 이런 장면이 떠오르는 것일까? 러시아 대부분의 지역은 늦은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꾸물꾸물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으로 파묻힌다. 그래서인지 러시아인들은 청명한 겨울날을 제일 좋아한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중학교 시절의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때 읽었던 <안나 카레니나>가 내게 선사한 풍경화 한 편이 아닐까. 아직까지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나의 학창시절은 당연하게도 공부에 대한 압박감을 머리에 이고 보내는 때였다. 중학생이라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든 않든 마찬가지였다. 70명이 넘는 학생들을 한 교실에 몰아넣은 서울 변두리의 학교. 닭장 같은 그곳이 우리를 숨 막히게 했지만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거의 없었다. 극단적인 방법을 제외하면 말이다. 인터넷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동호회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방과 후에 운동장에서 열심히 공을 따라 뛰거나 락 밴드의 테이프를 구해 열심히 듣는 것. 내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방법은 이것이 다였다. 다행히도 나에게 다른 길이 있었다. 우리 집이 서점을 했었기 때문이다. 죽어라 공을 따라서 뛰다가 지쳐서 집으로 들어오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책이 많았기 때문에 이것저것 내키는 대로 뽑아서 읽다가 재미없으면 다른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문고판으로 나온 <안나 카레니나>를 읽게 되었다. 정숙한 귀부인 안나 카레니나가 청년 장교 브론스키를 만나 불륜의 사랑에 빠지고 결국 안나는 불행한 사랑의 끝내기 위해 자살을 택한다. 중학생이었던 내가 톨스토이의 심오한 사상이나 주제를 이해했을 리는 없다. 소설을 읽으면서 떠올렸던 인물도 그 후에 본 영화와 뒤섞여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 그 시절 읽었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걸작 SF 영화 이상으로 판타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바로 문학의 힘이라는 것을 아주 한참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깨달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눈이 흩날리는 기차역 플랫폼에서 기관차가 뿜어내는 증기가 내 몸을 감싸는 것 같았고 백옥 같이 흰 살결 위에서 비단옷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녹음 우거진 대저택의 정원을 산책하는 귀부인과 장교, 흰 눈 위를 달리는 마차, 늦은 아침 사모바르에서 따라 마시는 뜨거운 차의 향기…. 소설을 읽으면서 떠올렸던 러시아의 이국적인 풍경이 한국의 서울 변두리 좁은 방에서 문고판 책을 들고 읽는 나의 머리 위로 날아다녔다. 아마도 그때 내가 그렸던 광경은 실존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러시아에 직접 갔을 때도 그러한 풍경이나 경험은, 근사치는 가능했지만, 맛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만의 판타지였다. 러시아의 귀족사회를 현실적이고 비판적으로 그려낸 톨스토이의 소설이 내게 준 판타지. 그때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서 그렸던 풍경은 내 삶의 판타지가 되었고 마음이 삭막하고 건조해진다고 느낄 때쯤이면 문득 떠올라 숨통을 틔게 해주었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는 기억 속에 톨스토이가 그려준 이국적인 풍경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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