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6.08 22:05
수정 : 2006.06.09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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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미래사
월터 워런 와거 지음. 이순호 옮김. 교양인 펴냄.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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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0년, 손녀에게 들려주는 21·22세기 역사
초대기업과 선진국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파국’은
세계연방의 성립과 해체, 공동체 자치시대로 이어진다
‘미래학서’라기보단 ‘현실 문명에 대한 비판서’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는 은하공화국의 대서사시를 무역연합의 도발로 풀어간다. 자유롭고 독점적인 무역권을 추구하던 행성과 집단들이 과세정책을 놓고 공화국 의회와 마찰을 빚다가 무역연합을 결성해, 나부 행성을 침공하는 것이 <스타워즈>의 시작이다. 혼돈의 와중 속에서 공화국은 제국으로 바뀌고, 악의 무리가 점령한 제국에 맞서 공화국을 회복하기 위한 싸움은 가열된다.
23세기를 눈 앞에 둔 2200년 역사학자 피터 젠슨은 손녀 잉그리드 젠슨에게 이런 <스타워스> 이야기같은 인류의 21~22세기 역사를 들려준다.
공룡처럼 몸집을 불려온 초대기업들은 2008년 세계무역컨소시엄을 결성해, 인류의 자본주의 역사에 변곡점을 찍는다. 세계 산업을 횡적·종적으로 독점한 몇 개의 초대기업들이 더욱 자유로운 이윤추구를 위해 국경을 뛰어넘는 이익집단을 결성한 것이다. 무역컨소시엄은 세계의 생산과 유통 등 산업을 장악한 초대기업들의 능력을 빌어, 특정 국가에 대한 거래 금지 등의 조처를 동원하면서 기존 국가권력을 넘어선다. 칼 마르크스를 빌리지 않더라도 자본주의를 살아본 사람이라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자본의 집중과 독점이 극대화되는 모습이다. 더 나아가 초대기업들은 이미 자신들의 꼭둑각시처럼 변해버린 미국 등 기존 강국의 정치지도자들을 움직여 ‘빈 체제’를 성립시킨다. 세계를 몇개의 특별관할권으로 나눠, 형식적으로는 유엔을 통해,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초대기업과 선진국이 통치하는 체제다. 자본주의와 함께 성립된 국가체제인 국민국가가 형해화한 것이다.
자본의 독점과 집중과 함께 불평등이 심화되고 대중들의 불만이 극대화된 21세기 중반 세계적인 부의 재분배를 주장한 정치세력이 미국의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빈 체체로부터의 이탈을 선언한다. 유럽연합 등 기존 빈 체제 세력들은 미국을 선제공격해, 인류의 70%가 절멸하는 3차세계대전이 발발한다.
23세기 미래에서 한 역사학자가 손녀에게 과거의 인류의 역사를 말해주는 형식을 취한 <인류의 미래사>(월터 워런 와거 지음, 교양인 펴냄)는 <스타워스>같은 공상과학물이 아니라 미래학 저서다.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다며 미래를 애매모호하고 희뿌옇게 그리는 기존의 미래학 저서와는 다르다.
‘세계체제론’ 입각한 구체적 전망
저자는 자본주의의 파국-세계사회주의 체제인 세계연방의 성립과 해체-다양한 공동체들의 자치시대를 뼈대로 하는 시나리오를 바탕에 깔고 미래에 전개됨직한 경제·기술·문화·사상 등을 묘사한다. 소설적 플롯과 주인공이 없을 뿐 한편의 공상과학소설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공상과학소설적 요소가 다분한, 세계당이 건설한 세계연방 체제나 작은당이 주도하는 소규모 공동체 자치시대 등은 미래를 묘사하는데 필요한 플롯일뿐이다. 저자는 이 장치를 빌어 미래 각 분야의 모습을 흥미롭게 전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파국 이후 세계연방체제와 소규모 공동체의 자치 등은 마냥 허구적 공상만은 아니다. 이매뉴얼 월러스턴 등 세계체제론자들의 아성이던 뉴욕주립대 빙엄턴 캠퍼스의 수훈교수인 저자가 그리는 이 책의 미래상은 세계체제론에 입각하고 있다. 세계 곳곳의 부유와 빈곤, 성장과 저성장은 별개의 현상이 아니라 서로간에 긴밀히 연관된 상호작용과 결과이며, 이는 16세기 자본주의의 발흥으로 본격적으로 성립돼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세계체제에서 세계경제는 핵심부, 주변부, 준주변부로 나눠지며, 이런 불평등은 핵심부에서 자본의 독점과 집중으로 깊어지며 결국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 때문에 이 책의 1부인 ‘극단의 시대’, 즉 자본주의 파국은 세계체제론에 입각한 구체적 전망이다. 자본주의를 3단계의 경기순환주기 또는 약 50년의 기간을 갖는 ‘장기파동’으로 설명하는 콘드라티예프 주기론에 따라 현재의 자본주의 국면을 분석한다. 즉 현재의 자본주의 국면이 마지막 장기파동의 활황국면이며, 이 장기파동의 끝인 21세기 중반께 자본주의가 파국을 맞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월러스틴도 여는 글에서 “구조적 문제 때문에 지금과 같은 형태로는 현재의 세계체제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관점을 제시한 작품”이라고 평한다. 저자는 1부에서 미래학이 전하는 미래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자본주의 상황이 필연적으로 도출할 결과에 대한 분석을 제시한다.
이 음울한 묵시록은 반면에 세계자본주의 체제인 세계연방의 성립과 해체, 소규모 공동체들의 자치시대 도래 등 다분히 저자의 희망이 반영된 틀거리도 제시하고 있다. 세계체제론을 말하는 진보적 성향의 저자가 역사의 발전에 따른 세계사의 장래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도 “아마겟돈, 천년왕국, 새 예루살렘의 종말론으로 묵시론적인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성서의 요한계시록 (…) 전 세계의 종교적·정치적 통합이 이뤄지는 ‘그 다음 단계’로 역사적 변천 과정을 설명하는 영국의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의 역사비전을 연상케 한다”고 고백한다.
세계체제 ‘지배국’ 된 한국도 등장
2·3부에서 눈여겨 볼 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사상과 기술의 변천이다. 저자는 결국 인류의 진보는 인류의 사상이라는 주관적 조건과 기술의 변화라는 객관적 조건이 결합돼 이뤄진다고 보고, 그 구체적 모습을 예측한다. 그 예측은 인류의 과거와 현실에 대한 반성과 성찰에 입각해 있다. 그런 점에서 <인류의 미래사>는 미래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인류문명에 대한 비판서다. 기존 문명비판서와는 달리 무척 재미있게 읽힌다는 게 장점이자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성장론자나 국가주의자들이 기뻐할 사족 하나. 이 책에서 한국은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지배하는 상위그룹 국가로 업그레이드되며, 빈 체제 수호자로 전쟁에 나선다.
정의길 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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