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23 17:39
수정 : 2005.02.23 17:39
행복하기 위해서 분노하지 말라 한다. “분노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을 뿐더러 감정만 키우게 되는 것이니, 내 생각이 옳다는 신념을 버리고 서로의 다름을 용납하라”고 한다. 그래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란 감정의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고통스러운 처지에서 헤죽헤죽 웃을 수는 없는 일이다.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우는 것이 자연스러우니 화날 때는 분노함이 솔직하고 마땅하다. 문제는 하루 일상 가운데서 정말 기쁘거나 진정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이다. 하루 중 즐겁지도 슬프지도 화나지도 않는 시간이 태반일 것이다. 바로 그 무심한 순간을 어떻게 사느냐가 행복의 관건일 것이다. ‘행복 만들기’로 바꾸자는 말이다. 행복하게 사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다. 수행이란 행복하기 위한 훈련이다.
사실은 무심의 상태도 솔직한 순간의 모습이다. 삶의 궤적은 바로 기쁘지도 화나지도 않을 때의 얼굴로 나타난다. ‘나이 40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은 바로 그 상태를 말한다. 무심의 순간은 순수 감정의 상태다. 백지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감사와 기쁨의 얼굴도 되고 잠재된 불만족과 권태의 얼굴도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좋은 열매를 얻으려거든 좋은 나무를 길러라(마태 12,33)” 하셨다. 행복이란 열매는 삶의 의미가 충만함에서 열린다는 말이다. 물가에 심어진 나무만이 싱싱한 것이 아니다. 태양을 향해 가지를 벌리고 햇빛을 잘 받아들이는 나무는 메마른 가뭄에도 대지로부터 생명의 물을 빨아올린다. 일이 잘 풀리고 좋은 일만 많아야 행복한 것은 아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일거리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으리라.
밝은 태양 아래 가려진 것은 어둠이라 하지 않고 그늘이라 한다. 그늘이 쉼터의 즐거움을 준다. 생의 의미가 충만한 삶은 무심한 순간을 행복감으로 바꾼다. 그래서 심지어 슬픔과 분노마저도 여여함이 된다. 오늘 내 성정의 아름다운 나무를 미소로 가꾸어야겠다.
박기호 신부/ 서교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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