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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진화론’을 종합적으로 흡수하면서 인류의 운명을 사유한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는 과학적 시간과 대별되는 창조적 시간 개념인 ‘지속’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는 시간의 역동성과 생명체의 내적 자발성이 ‘생명의 비약’을 가져온다고 봤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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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적 시간에서 태어나고 변하고 소멸하는 진화론에서 ‘시간의 역동성’ 발견한 베르그송
기계론적 혹은 목적론적 결정론 반박 존재의 내재적 자율성 통한 ‘질적 비약’ 사유
고전 다시읽기/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우리는 인간과 삶, 가치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보다 근거 있는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이 분명히 제시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들 중에서 세계 이해를 현저하게 바꾸어놓은 중요한 관점들 중 하나는 진화론이다.
서구인들이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은 대체적으로 말해서 본질주의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여기에서 본질이란 무엇인가? 이 개념은 플라톤의 이데아에 뿌리두고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어 온 일군의 개념들과 연계된다. 형상(形相), 실체, 실재, 본체 등의 개념들이 그것들이다.
이 개념들은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 근저에서 어떤 부동의 본질을 찾아내려는 성향과 결부되어 있다. 예컨대 화학은 어떤 물질의 다양한 성질들을 넘어 그 속에서 화학적 본질을 찾아낸다. 세상에 존재하는 물들은 그것들이 어떤 물들이든 모두 ‘H2O’인 것이다.
이렇게 사물들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전통 사유에서 면면히 내려온 한 경향이라 할 때, 이런 경향의 생물학적 표현이 곧 ‘종’ 개념이다. 본질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각각의 종은 일종의 이데아, 본질을 가진다. 때로 변형이나 일탈, 예외 등이 존재한다 해도 하나의 종은 영구불변의 본질로서 이해된다.
진화론은 바로 이 생물학적 본질들을 더 이상 항구불변의 본질들로 보지 않는 시각을 마련했다. 종들은 시간 안에서 태어나고 변하고 또 소멸하는 것이다.
19세기 이전 ‘시간 망각의 역사’ 19세기 서구 사상을 전반적으로 평가할 때 ‘시간의 발견’이 그 핵심 갈래들 중 하나를 형성한다. 생물학에서의 진화론의 등장, 사회과학에서의 정치경제학의 등장, 언어학에서의 ‘비교문법’의 등장, 그리고 인간과학 전반에서 역사학의 높은 위상 등, 19세기는 서구 학문이 플라토니즘의 긴긴 그림자를 떨쳐내고 시간을 재발견한 시대로 특징지어진다. 진화론 역시 이런 흐름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조이다. ‘진화론’은 하나의 이론이라기보다는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고대에서부터 지속되어 온 진화론적 사유는 19세기에 이르러 과학적 정교성을 획득하게 된다. 라마르크의 진화론, 퀴비에의 비교해부학, 조프루아 쌩-틸레르의 ‘추상동물’ 개념에서 시작된 근대 생물학은 다윈과 왈라스의 진화론에 이르러 기계론적 설명(넓은 의미)의 정교함을 획득하게 된다. 그 후 다윈주의 및 이를 비판하고 나온 다양한 진화 이론들이 생물학사, 생명사상사를 수놓게 된다. 지금부터 꼭 100년 전(1907년)에 출간된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는 19세기에 이루어진 이런 진화론 사상을 종합적으로 흡수하면서 진화의 의미와 인류의 운명을 사유한 위대한 걸작이다. 베르그송의 이 작품은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마지막 4장은 앞의 세 장과는 다소 별도의 구성을 보여준다. 이 마지막 장은 베르그송의 철학사를 보여주며, 다른 장들을 읽기 전에 먼저 읽어도 좋다. 베르그송은 서구 학문사가 시간의 근본적인 의미를 망각해 왔음을 고발한다. 서구 학문의 역사는 시간 망각의 역사인 것이다. 이런 역사가 극복된 것은 19세기이지만, 그러나 베르그송은 이 시대마저도 시간이라는 존재가 함축하는 역동성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서구 학문이 이런 길을 걷게 된 것은 그 시초에 엘레아학파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로 대변되는 엘레아학파는 생성을 “가상”으로 보고 영원부동의 일자(一者, the One)를 진실재(眞實在)로 봄으로써 생성에 대한 존재의 우위를 확립했다. 그 후 플라톤에 의해 엘레아학파의 여러 측면들이 극복되었지만, 존재를 생성의 위에 놓는 전통은 (시간의 의미를 힐끗 보았던)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구 학문의 역사를 길게 지배했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열역학, 진화론, 정치경제학, 사적 유물론, 니체의 생기존재론을 비롯해 다양한 담론들이 시간을 재발견하기에 이른다. 베르그송은 헤겔 이후 전개된 19세기 시간론의 정점에서 ‘지속’의 철학을 펼치게 된다. 베르그송이 겨냥하는 핵심적인 논적들은 진화에 대한 기계론적 설명과 목적론적 설명이다. 이 두 설명에 공통적으로 결여된 것은 시간이란 그 안에 창조의 계기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다. 기계론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조건들로부터 그 결과를 이끌어낸다. 반대로 목적론은 미래에 존재하는 어떤 목적을 근거로 사물들의 방향성을 파악한다. 둘 다 ‘때문에’를 이야기하지만, 기계론은 어떤 원인들 때문에 어떤 결과가 발생한다고 생각하고 목적론은 어떤 목적 때문에 사물들이 그렇게 움직인다고 말한다. 기계론이 과거에서 현재로 ‘미는’ 사유라면, 목적론은 미래로부터 현재를 ‘끌어당기는’ 사유이다. 미리 정해져 있다면 삶의 의미는? 이 두 사유에 공통으로 결여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시간에는 어떤 창조적 차원, 예견 불가능한 차원, 생기(生起)의 차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현재가 과거의 결과일 뿐이라면, 현재가 미래에 의해 미리 그려져 있다면,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10년 후의 일이 지금 이미 정해져 있다면 지금부터 그 10년까지의 시간이란 도대체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다. 또 현재의 우리의 삶이 과거의 원인들에서 필연적으로 연역되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베르그송은 서구 학문을 끈질기게 지배해 온,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결정론(決定論)에 결정적인 반론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니체와 더불어) 베르그송은 현대 존재론의 문턱을 형성한다. 생명사상의 맥락에서 베르그송의 이런 생각은 ‘약동(elan)’이라는 개념에 응축되어 있다. 늘 그렇지만, 우리는 개념을 이미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최근에 ‘노마디즘’을 둘러싼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이 잘 보여주듯이, 개념을 정확히 개념으로서 이해하지 않고 일종의 이미지 또는 인상으로 받아들일 때 모든 오해와 왜곡이 시작된다. 베르그송의 철학도 이런 이미지/인상의 메커니즘에 휩쓸려들기 쉬운 철학이다. 형상적인(figurative) 표현들을 즐겨쓰는 사상가들이 겪게 되는 운명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형상적 표현들이 오랜 시간에 걸친 개념적 고투의 산물이라는 점을 꼭 기억하자. 존재론의 입구에 서있는 베르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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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철학아케데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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