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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06 19:37 수정 : 2006.07.07 14:47

황정민/아나운서

나는 이렇게 읽었다/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삐삐가 죽었다. 한동안 우리들 사이에는 그런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말괄량이 삐삐가 나무 위에서 촬영을 하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겁니다. 인터넷도 없었는데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우리들을 놀라고 슬프게 했습니다.

얼마 전 <말괄량이 삐삐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란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삐삐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웬 중년 아줌마가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연기 생활을 했지만 주목 받지 못하고 한 회사에서 비서로 일하는 삐삐. 그녀를 대중 앞에 끌어냈던 건, 그녀의 매력을 잊지 못했던 어느 기획자였습니다. 나이 든 삐삐의 얼굴에는 풍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습니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마음 한구석을 풀어 주는 듯한 그 환한 미소뿐이었습니다.

삐삐의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어디 그 기획자뿐이겠습니까. 내게도 삐삐는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혼자 뒤죽박죽 별장에 사는 것도, 원숭이 닐슨 선장도 멋졌습니다. 어른들의 틀 안에 삐삐를 가두려는 어른들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삐삐의 괴력과 해결방식이 부럽고 또 부러웠습니다.

여기 또 한 명의 동지가 있습니다. 비읍이. 이름도 참 재밌지요? 학교에 들어가서 ㅂ을 배우고 나서 ㅅ을 알게 되고 우리말 자음과 모음이 줄줄이 머릿속으로 들어 온 것처럼 아빠는 비읍이를 얻고 나서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고 해서 비읍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빠는 비읍이가 어릴 때 돌아 가셨습니다. 치과 보조사로 일하는 엄마는 비읍이가 ‘아빠가 없이 자란 아이’라는 소릴 듣지 않도록 무척 엄격하게 대합니다.

비읍이는 엄마의 얘기를 들으면서 삐삐를 알게 됩니다. 엄마에 따르면 삐삐는 못된 어른을 혼내주고 불쌍한 아이는 구해주는 정의의 용사였습니다. 엄마는 깊은 밤 베란다에서 삐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삐삐를 부르는 환한 목소리. 삐삐를 부르는 상냥한 목소리…” 노래를 부르는 엄마는 부쩍 외로워 보였고 그래서 비읍이는 <말괄량이 삐삐>가 슬픈 영화라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비읍이는 삐삐를 만나고 나서 새로운 꿈을 꿉니다. 백만장자가 돼서 항상 피곤한 엄마를 돕고 삐삐의 작가 린드그렌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꿈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비읍이가 린드그렌 선생님 책을 사는 게 못마땅합니다. 한번 보고 말 책을 왜 꼭 돈 주고 사야 하냐는 겁니다. 비읍이는 책을 사서 언제든지 읽고 싶은데 한사코 가로막는 엄마가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그런데 좀 더 싸게 책을 사려고 헌책방을 뒤지던 비읍이 앞에 역시 린드그렌 선생님의 팬인 ‘그러게’ 언니가 나타납니다. 비읍이 이야기에 “그러게”라고 맞장구 쳐주는 언니는 금방 비읍이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비읍이는 린드그렌 선생님을 만나는 날을 꿈꾸며 일기장에 편지를 씁니다. 때로는 가출을 꿈꾸기도 하고 백만장자가 되는 상상도 해보면서 한 뼘씩 커 가는 비읍이의 모습을 담아 놓았습니다.

저에게도 비밀 일기장이 있었습니다. 비밀이랄 것도 없는 나이였지만 일기장을 만들어 놓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길 즐겨 했습니다. 잊어버린 제 모습을 비읍이를 통해 보니 반가웠습니다. ‘나도 그랬었지…’하는 마음과 삐삐를 좋아하던 마음, 그때의 제 모습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일기를 마지막으로 쓴지 어언 10년이 지났습니다. 이사를 앞두고 짐을 정리하면서 들춰본 제 일기장은 참 재미있더군요. 비읍이를 만나고 부터 분주한 일상 속에서라도 하루하루 작은 기록을 남겨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가끔씩 들여다보는 제 일기장에서도 한 뼘씩 커 가는 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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