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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06 20:40 수정 : 2006.07.07 14:51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허영철 구술·기록. 보리 펴냄. 1만2500원

36년을 감옥서 보낸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 일대기
“출소 뒤 왜 열심히 살았냐고? 당원으로서의 도덕적 책무 벗어날 수 없어서지”
구술·재판기록 등 실감나는 ‘한국 현대사 읽기’

일본인 납치문제 보도들을 보노라면 기묘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요코타 메구미와 김영남씨, 그리고 그 가족 친지들에 뒤얽힌 기구한 사연들과 한·일 양국, 거기에 미국 사회까지 가세해 펼치는 다차원적 파노라마가 국제적 관심사로 부각되면서 그런 느낌의 강도와 빈도수는 점점 증폭되고 있다. 다분히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미국이 이라크와 관타나모 등지에서 저지르고 있는 반인권적 만행을 얼버무리는 정치적 기회로 작용했을 법한 한일 피랍 가족들의 백악관 방문과 환대, 그리고 금강산에서의 김영남씨 가족 상봉과 거기에 3류 첩보전을 보듯 요란스러웠던 일본언론들의 취재경쟁.

그런 장면들이 기묘하다는 느낌은 그것이 더 본질적인 뭔가를 은폐하는 장치로 연출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일본인 납치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범죄행위라는 건 두말할 것 없고 일본사회의 슬픔과 분노와 규탄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눈물의 드라마에는 북한의 ‘과격 종파분자들’을 그 길로 몰아간 일본과 북한의 악연, 너무 오래고 너무 깊어 이젠 손도 대기 어려울 정도로 썩어문드러진 역사의 생채기들은 어디에도 없다. 드라마가 극적이면 극적일수록 은폐의 완성도는 그만큼 더 높아진다. 드라마의 감동에 눈먼 세계는 한꺼풀만 더 벗기면 한 나라가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반세기 가까이 수천만명을 식민지배하면서 그들의 재산과 문화를 파괴하고 모욕했으며, 수백만명을 강제연행해 위안부로 광부로 전쟁기계로 내몬 사실이 쏟아져나온다는 걸 모른다. 남북한 분단과 전쟁과 1천만 이산가족의 비극이 거기서 비롯됐으며 납치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이른바 북-미 대립, 북-일 갈등의 한쪽 당사자들이 이 드라마 연출의 또다른 주역이라는 사실도 그늘속에 가려진다. 부각되는 것은 ‘무모하고 뜬금없고 난데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북한의 돌출행위뿐이다.

빨치산 동생 둘·사촌들 사살돼

36년이란 세월을 감방에서 보낸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보리 펴냄)를 읽을 때도 묘한 느낌이 든다. 장기수 문제를 대하는 우리사회의 시선이나 논란은 진실 또는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본인 납치문제와는 반대로 우리사회의 장기수 문제 다루기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생각하게 한다. 지금까지 장기수들에 대한 책이나 영화 등이 적지않게 나왔지만 지금도 조선노동당의 충직한 당원으로서 자신의 이력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당당하게 밝히는 구순을 바라보는 ‘노 혁명가’ 허영철의 일대기는 또 색다르다. 예컨대 그는 출소한 뒤 7년여 기간 아파트 경비원 생활을 하면서 공로패를 받을 정도로 성실하게 일했는데, 그 변을 들어보자. “왜 열심히 해야 하나? 누군가 묻는다면, 공산당원이라면 비록 조직을 떠나 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인 책무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내 모습이 곧 당을 대신할 수 있으므로, 그러므로 나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평생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한 번도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내 이상과 내 동지들이 항상 나를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언제나 든든했지요.” 책 마지막 인터뷰에서 허영철은 자신이 잘 웃는 사람으로 소문났다면서 “우리 모두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냐고 다짐하듯 말했다. 보리 제공
그는 1920년 전북 부안군 보안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국내 공사판과 일본 홋카이도 탄광, 아오지 탄광 등을 떠돌았다. 광복과 함께 남로당에 들어가 적극적인 현장활동을 벌였다. 전쟁 때 부안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됐으며 연합군의 인천상륙 뒤 ‘서울방어전’에 투입됐다. 북으로 후퇴한 뒤 중앙당학교에 입교했다. 황해도 청수면 임시인민위원장과 장풍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약했다. 52년 남파 공작원을 양성하는 금강학원에 들어갔고 54년 남파됐으나 약 1년 뒤 체포당했다. ‘국가보안법위반 및 간첩미수’ 죄목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91년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출소했지만 여전히 역사문제는 내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살아온 생애 내내 역사는 단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역사문제란 결국 분단해소요 민족통일이다.

동생 둘도 입산해 ‘빨치산’에 가담했다가 사살당했고 큰집, 작은집 형들도 입산했다가 전사했다. 6개월 남짓 결혼생활을 한 뒤 40년간 생이별을 하고 서른 번 넘게 이사를 다니며 그를 원망하며 살았던 부인은 지금 그의 편이 됐다. “그래도 아내는 내 원망을 거의 하지 않는다. 자식들에게도 그런 원망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참 고맙다. 눈물겹게 고맙다.”

40년 생이별했던 아내는 ‘내 편’

골수 조선노동당원의 한국 현대사 읽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가 배워 온 현대사와는 확연히 다른, 이런 현대사도 가능한 것이다. 아니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로 엄연히 존재한다. 공식적인 조선노동당사와는 전혀 다른 어느 충직한 조선노동당원이 바라보는 현대사 읽기는 그러나 시선을 아래를 향하고 있다. 유명인 또는 유력자의 시선, 공식적인 시각이 아니라 민중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여섯 개의 구술·기록장, 장과 장 사이에 편집자가 끼어들어 진행하는 인터뷰, 구술 가운데 따로 들어가는 미니 안터뷰, 남쪽과 북쪽의 시각을 동시에 보여주는 각주들, 처형당안 박헌영 재판 판결문 등 출판사의 독특한 편집기획도 인간 허영철과 당대 민중사를 드러내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추천사를 쓴 윤구병 선생 얘기.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한테 ‘좋은 글이란 어떤 글인가?’ 하고 물었을 때 그 분 말씀이 이랬다. ‘읽고 나서 불편한 느낌이 드는 글.’ 그렇다. 이 책에는 당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많을 것이다. 특히 당신이 평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나도 처음에 이 글을 읽고 몹시 불편했음을 고백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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