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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허영철 구술·기록. 보리 펴냄. 1만2500원 |
36년을 감옥서 보낸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 일대기
“출소 뒤 왜 열심히 살았냐고? 당원으로서의 도덕적 책무 벗어날 수 없어서지”
구술·재판기록 등 실감나는 ‘한국 현대사 읽기’
일본인 납치문제 보도들을 보노라면 기묘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요코타 메구미와 김영남씨, 그리고 그 가족 친지들에 뒤얽힌 기구한 사연들과 한·일 양국, 거기에 미국 사회까지 가세해 펼치는 다차원적 파노라마가 국제적 관심사로 부각되면서 그런 느낌의 강도와 빈도수는 점점 증폭되고 있다. 다분히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미국이 이라크와 관타나모 등지에서 저지르고 있는 반인권적 만행을 얼버무리는 정치적 기회로 작용했을 법한 한일 피랍 가족들의 백악관 방문과 환대, 그리고 금강산에서의 김영남씨 가족 상봉과 거기에 3류 첩보전을 보듯 요란스러웠던 일본언론들의 취재경쟁.
그런 장면들이 기묘하다는 느낌은 그것이 더 본질적인 뭔가를 은폐하는 장치로 연출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일본인 납치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범죄행위라는 건 두말할 것 없고 일본사회의 슬픔과 분노와 규탄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눈물의 드라마에는 북한의 ‘과격 종파분자들’을 그 길로 몰아간 일본과 북한의 악연, 너무 오래고 너무 깊어 이젠 손도 대기 어려울 정도로 썩어문드러진 역사의 생채기들은 어디에도 없다. 드라마가 극적이면 극적일수록 은폐의 완성도는 그만큼 더 높아진다. 드라마의 감동에 눈먼 세계는 한꺼풀만 더 벗기면 한 나라가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반세기 가까이 수천만명을 식민지배하면서 그들의 재산과 문화를 파괴하고 모욕했으며, 수백만명을 강제연행해 위안부로 광부로 전쟁기계로 내몬 사실이 쏟아져나온다는 걸 모른다. 남북한 분단과 전쟁과 1천만 이산가족의 비극이 거기서 비롯됐으며 납치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이른바 북-미 대립, 북-일 갈등의 한쪽 당사자들이 이 드라마 연출의 또다른 주역이라는 사실도 그늘속에 가려진다. 부각되는 것은 ‘무모하고 뜬금없고 난데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북한의 돌출행위뿐이다.
빨치산 동생 둘·사촌들 사살돼
36년이란 세월을 감방에서 보낸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보리 펴냄)를 읽을 때도 묘한 느낌이 든다. 장기수 문제를 대하는 우리사회의 시선이나 논란은 진실 또는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본인 납치문제와는 반대로 우리사회의 장기수 문제 다루기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생각하게 한다. 지금까지 장기수들에 대한 책이나 영화 등이 적지않게 나왔지만 지금도 조선노동당의 충직한 당원으로서 자신의 이력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당당하게 밝히는 구순을 바라보는 ‘노 혁명가’ 허영철의 일대기는 또 색다르다. 예컨대 그는 출소한 뒤 7년여 기간 아파트 경비원 생활을 하면서 공로패를 받을 정도로 성실하게 일했는데, 그 변을 들어보자. “왜 열심히 해야 하나? 누군가 묻는다면, 공산당원이라면 비록 조직을 떠나 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인 책무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내 모습이 곧 당을 대신할 수 있으므로, 그러므로 나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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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한 번도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내 이상과 내 동지들이 항상 나를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언제나 든든했지요.” 책 마지막 인터뷰에서 허영철은 자신이 잘 웃는 사람으로 소문났다면서 “우리 모두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냐고 다짐하듯 말했다. 보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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