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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13 20:50 수정 : 2006.07.17 22:29

최성일/출판 칼럼니스트

<히(He)―신화로 읽는 남성성> 로버트 존슨 지음, 고혜경 옮김. 동연 펴냄

나는 신화와 종교, 그리고 역사에 대한 관심도가 낮은 편이다. 자연히 이들 분야 책을 덜 읽게 된다. 신화만 해도 그렇다. 어섯눈 뜰 무렵 에디스 헤밀턴의 <그리스 로마신화>를 읽긴 했으나, 몇 년 전 우리 독서계에 불어온 신화 열풍은 애써 못 본 척하기도 했다. 아무튼 짧은 분량이 만만해 보이고 심리학적 접근을 꾀한 데다 신화에 관한 기초지식까지 얻을 수 있겠다 싶어서 로버트 존슨의 <히(He)―신화로 읽는 남성성>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들어가는 글’에서 이 책이 성배를 찾아 떠나는 12세기의 파르시팔 신화를 다루리라는 언질을 접하고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취약한 분야가 겹치는 ‘삼중고’에 시달리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 일었다. 하여 관련서적에서 부랴부랴 성배의 정확한 뜻을 새겨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성배와 연금술>에 나오는 설명이 똑 부러지는 것 같진 않다. 차라리 <신화로 읽는 남성성>의 풀이가 간명하다. “최후의 성찬 때 그리스도가 사용했다는 전설적인 잔으로 구원의 열쇠이다.”

이 책은 12세기 후반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고대 프랑스어 운문으로 된 판본에 기대어 성배신화를 남자의 심리적 발달과정에 빗댄다. ‘성배를 향한 기나긴 여정’은 한 남자의 일생인 셈이다. 또한 존슨은 성배신화가 현대인이 받고 있는 고통의 특성을 분명하게 담아내며, 이러한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처방을 특이한 방법으로 기술한다”는 시각을 견지한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성배신화는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그것을 품고 있는 ‘성배의 성(城)’에 진입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성배의 성은 늘 그렇게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청소년기 중반이나 중년의 나이에 쉽게 열린다.” 남자는 평생에 두 번 ‘성배의 성’을 드나든다. 처음이 어른이 되기 위한 사춘기의 정신적 성장통이라면, 나중은 이제 노년기로 들어선다는 신호임 직한 장년층이 겪는 갱년기의 징후다. 한편, 남자의 성장과정에서 어머니로부터의 독립은 필연적이다. “성숙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어머니에게 불충실하지 않는 한, 절대 완숙한 남자로 성장하지 못한다.”

이 책의 핵심은 20년 만에 ‘성배의 성’을 다시 찾은 파르시팔이 던진 물음이다. “성배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존슨은 이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본질적으로 이 말은 우리가 던질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질문이다. 인간 정신의 구심점은 어디인가? 혹은 인간의 삶에서 의미의 중심은 어디인가?” 파르시팔이 말을 맺기도 전에 성벽이 흔들리며 대답이 들렸다. “성배는 성배왕을 위해 존재한다.” 존슨은 이것을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넘어선 더 큰 무언가를 지칭하기 위해 만든 수많은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는, 그 존재를 위해 성배가 존재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성배 탐색은 결국 신을 섬기는 일이다.” 파르시팔이 그의 여정에서 만나는 적기사, 대부 구르몽, 여인 블랑시 플레르 등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존슨의 책은, 이와 비슷한 분량으로 인상적이었던 미셸 푸코의 <정신병과 심리학>(문학동네)이나 에드워드 사이드의 <프로이트와 비유럽인>(창비)과는 다른,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는 단아한 소품이다. 존슨의 <쉬(She)―신화로 읽는 여성성>도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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