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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17 20:47 수정 : 2006.07.17 20:47

빨랫방망이를 깎는 노인. 천진한 아이들이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는 가운데 모르쇠 방망이만 깎아대는 모습이 노쇠한 대한제국을 보는 듯하다. 개마고원 제공

러시아 탐사대 조선 여행서
‘코레아 1903년 가을’
외세 먹잇감 조선의 뒷모습 증언

대한제국의 말기 늙은 조선의 뒷모습 또는 열강 서리에서 몸둘 바 모르는 우리의 과거를 증언하는 책이 또 나왔다. 러시아 황실지리학회 탐사대의 일원으로 1903년 10월 한달 동안 한국을 여행한 세로셰프스키의 〈코레아 1903년 가을〉(개마고원)이 그것.

“그놈들은 최악입니다. 그들은 산 채로 우리 목에 올가미를 걸고 있어요. 그놈들이 은행을 열어서 우리한테 돈을 빌려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곧 그들의 노예가 될 겁니다. 서울 땅의 삼분의 일이 벌써 그들 소유라는 것을 아십니까? 다들 그들에게 저당잡히고 또 잡히고 있지요.” 서울의 젊은이 입을 빌려 말하는 일본의 침략상이다.

이 책은 여행기라기보다는 당시 조선에 관한 종합보고서. 배경은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3년, 부산에서 뱃길로 원산으로 간 뒤 금강산→평강→양담→안양→양주로 해서 서울로 이어지는 여정이다. 현장기로 말문을 열고 비숍, 그리피스, 해밀턴, 달레, 오페르트 등 전임 기록자의 저서와 〈한국의 보고〉(1892~98) 등 정기간행물을 훑어 발췌 요약하는 식으로 기록했다.

일본의 음험함은 곳곳에 스며 있다. 석왕사의 승려들은 검은빛의 일본식 기모노를 입고 낡고 속이 비치는 검은빛의 일본식 두건을 쓰고 있었다(78쪽). 일본(러시아 포함)의 어부들이 무주공산 동해의 고래를 훑어가고 있었다(146). 일본의 도매상들은 봄만 되면 대리인을 풀어 파종 때 필요한 자금을 농민들한테 대출해주고 대신 수확량의 절반을 선점한 뒤 가을이 되면 계약을 이행하는 식으로 농민을 갈취했다(283).

하지만 그의 눈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일본인 거주지역인 진고개였다(392). 정리가 잘 돼 있고 질 좋은 상품이 그득한.

한편 대한제국의 모습은 구차하기 짝이 없다. 궁궐에는 누더기를 걸치고 술에 취한 부랑자 같은 군인이 주둔해 있고(370쪽) 군사기구와 조병창 역시 서류로 존재할 뿐이거나 형편없었다(371). 봄에 곡물을 대출해주는 환곡 역시 모아들인 쌀은 관리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104). 방곡령 때 정부는 10만달러를 손해봤지만 관리들은 남아도는 곡물을 헐값에 사들여 외국에 팔아 큰 이익을 챙겼다(273). 사람들은 사또 관리 파발꾼이 지나가면 ‘강도 납신다’라고 말했다(305).

보이는 것 또한 다르지 않다. 거리는 먼지나 거름더미가 넘쳐나는데다 보도가 깔린 곳은 없으며 길 한가운데 웅덩이가 있거나 구정물이 흘렀다(387). 별볼일없는 상점들 가운데 장례용품점이 인상적이었는데, “이 민족은 수많은 슬픔을 겪어 장례조차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인가”라는 비아냥 대상이다(388).

고자세 양인의 눈에 비친 우리 모습인 점을 감안해, 기록의 공백을 메워줄 재료로 참고할 만하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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