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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랑켄슈타인>의 한 장면. 1931년 미국 제임스 웨일 감독 작품.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괴물은 과학기술에 대한 19세기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이 괴물은 ‘익명’이며, 파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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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과학기술의 상징이었던 ‘괴물’
정체를 몰라 이름도 없고 험오스러웠다
차가운 기술에 따뜻한 숨결 주자는 이분법에
시몽동은 “기계-인간 맞물리며 진화” 반박
중요한 건 ‘인간적’ 문명에 이바지 여부
기술 속 사상/⑭ 기술과 상징
어떤 노인이 밭일을 하고 있었다. 항아리를 안고 힘들게 물을 떠오고 있었다. 이를 본 젊은이가 왜 편리한 ‘기계’를 쓰지 않는지 물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기계는 기계로서의 기능과 효율이 있다. 여기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사람의 본성을 망치게 된다.” 중국의 고전 ‘장자’에 나오는 얘기이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근대적 기술비판의 원점을 찾을 수 있다. 기술의 편리함을 추구하다보면 사람이 기계에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타나 있다.
그런데 물동이는 일종의 기술적 산물이다. 흙을 반죽하여 불로 구워낼 줄 알아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노인 역시 기술을 이용하지 않았는가? 어떤 사람은 이때 물동이처럼 소박한 도구와 수차(水車) 같은 기계의 차이를 지적할 것이다. 도구가 자연에 순응한다면 기계는 자연을 이용하거나 거스른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부족하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장자 시절의 기계란 모두 자연력에 순응하는 것들이니까. 현대철학자 하이데거를 떠올려보라. 20세기를 무시무시한 ‘원자력의 시대’로 정의할 때 그는 수차 같은 옛 기계들을 얼마나 정겹게 묘사했던가? 여기에 물음이 있다. 장자에게는 괴물이던 기계가 하이데거에게는 낭만적인 사물로 바뀐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장자에게 괴물 하이데거에겐 낭만
하나는 분명하다. 대상의 정체를 모를수록 더 두렵고 혐오스러울 수 있다는 것. 근대기술을 둘러싼 이미지에도 이런 측면이 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1818년)를 생각해보라. 여기서 괴물은 과학기술의 상징이기도 하다. 몸은 ‘자연재료’로 되어있지만, 그 생명은 기술의 결과이니까. 그런데 괴물에게는 이름이 없다. ‘아버지’는 그에게 이름을 붙여줄 마음도, 여유도 없었다. 이것은 결국 괴물을 만든 박사조차 기술의 정체를 몰랐다는 것, 그리하여 기술의 산물을 혐오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럴수록 괴물은 더욱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끝내 파괴되지 않았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마치 산업혁명과 기계파괴 운동 사이에서 표류하던 19세기 기술의 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지금도 사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과학기술을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추켜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간성 파괴의 주역인 것처럼 깎아내리는 사람도 있다. 혼란스럽다. 우리는 아직도 기술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못한 것이다. 이런 혼란은 어쩌면 인류가 처음 겪는 일이다. 전통사회에서 기술에는 나름대로 분명한 위치가 있었다. 가령 ‘사농공상’이라는 질서는 어쨌거나 당시 사회에서 기술이 차지하던 위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과학기술의 의미는 괄호 속에 들어있으며 다만 그 효용과 부작용만 논의되고 있다. 20세기 중반, 미국의 철학자 멈포드는 이런 문제를 지적하며 상징 개념을 제기했다. 여기서 상징이란 인간의 정서적 소통을 비롯해 개성, 창의성, 상상력과 연관된 문화 활동을 포괄한다. 그가 볼 때 문제는 상징 능력과 기술 사이에 균형이 무너진 데에 있다. 기술이 너무 빨리 성장한 바람에 그 문화적 의미를 소화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상대적으로 뒤쳐진 인간의 상징 능력을 북돋우어 다시 균형을 되찾자고 제안했다. ‘능동’적인 제안이다. 실질적으로 인문 예술을 좀더 발달시키자는 주장이니까. 그래서 ‘종합’적이다. 기술을 제한하기보다는 그것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내성’을 길러, 한결 풍성한 문화를 만들자는 얘기이니까.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기술과 상징이라는 이분법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상징은 주관적, 개성적인 반면 기술은 객관적, 기계적이다. 즉, 기술 속에는 ‘의미 있는 상징’이 없고 기계에는 인간적인 요소가 없다. 이렇게 차가운 기술에게 따뜻한 숨결을 불어주는 것이 상징 능력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람처럼 기술 잠재력도 미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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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기계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질베르 시몽동(1924-89). ‘포스트 구조주의’에 까지 영향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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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한국해양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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