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전쟁 직전 조선의 정치상황과 당시의 왕이었던 선조의 인물 됨에 대해서 약간 말해보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본래 서인(西人)이었던 정여립은 뛰어난 수재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서인의 거두인 율곡 이이 선생이 돌아가신 후 돌연히 당파를 동인(東人)으로 바꾼 다음 서인들을 비판하다가 선조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낙향하게 된 불운한 사람이기도 했다. 비록 낙향은 하였으되 본래부터 학식이 높고 교류가 넓었던 정여립에게 느닷없이 모반의 혐의가 씌워진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년 전(1589년)의 겨울이었다. 정여립은 죽은 채로 압송되었지만 역모라는 엄청난 사건이 혐의자가 죽는 것으로 끝날 리가 만무했다. 즉시 전모를 파헤칠 심문관들이 구성되었지만 도무지 가닥을 잡을 수 없었다. 심문관들은 영의정인 이산해(李山海)를 비롯한 동인들이었다. 그때는 주로 퇴계 이황 선생의 학맥인 동인들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그렇게 구성이 되었는데, 선조는 너희들이 정여립과 같은 동인이기 때문에 그놈을 감싸고도는 것이 아니냐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때 어찌 된 일인지 유배 중이었던 서인의 맹장 정철(鄭澈)이 도성으로 들어오자 선조는 즉시 그에게 심문관을 맡겼다. 사미인곡(思美人曲)등의 주옥같은 시를 지어 선조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절절히 노래하던 정철은 잔혹한 인간사냥꾼이 되는 것으로 선조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정여립이 모의했다는 반역의 후폭풍은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으로 조선을 강타했다. 정철은 반대파인 동인들만 때려잡지 않았다. 의금부의 전옥을 비롯한 각 관청에는 역모 혐의자가 넘쳐났지만 그들 대부분은 억울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혹독한 고문에 못이긴 그들은 혐의를 시인했고 이름이 떠오르는 자들을 고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 천의 억울한 죽음이 양산되었고 동인과 서인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철천지원수가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전까지의 대립은 학맥과 지역에 의한 것이어서 그렇게 살벌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여립이 서인에서 동인으로 전향한 사례만 보아도 쉽게 입증된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는 피를 부르는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심장에 칼을 꽂는 것이 반복되는 처절한 당파싸움을 발아(發芽)시킨 자가 과연 누구일 것인가?
이번 사건에서 가장 이득을 본 것은 역시 선조였다. 선조가 가장 눈독 들인 것은 역모혐의자들의 일기와 비망록이었다. 압수된 그것들은 즉시 선조의 손에 들어갔다. 그것을 읽는 선조의 얼굴은 마치 칠면조처럼 변했다. “없을 때는 임금도 욕 한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상당수의 비망기(備忘記)에서는 정치적이거나 개인적인 극비사항과 함께 선조가 야비하고 용렬하다는 것이 숨김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선조는 자신이 입수한 일기와 비망기를 통해 정보를 얻는 동시에 신하들의 약점을 잡은 다음 그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했다. 그것은 선조가 얼마나 야비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는데, 사관(史官)들이 임금의 행실을 기록하는 사초(史草)를 강제로 열람하여 보복한 연산군의 폭거(暴擧)보다 한 술 더 뜰 지경이었다.
선조의 비호 아래 영원할 것만 같았던 서인들의 전성시대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의 지위가 확고한 것으로 착각한 정철은 세자를 세우자는 건저(建儲)를 주청한다. 그때까지 정실의 왕후가 생산한 원자(元子)는 없었고 후궁들에게서 난 아들들이 득실대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정실 왕후에게서 생산을 기대하기는 어려워보였다. 현실을 인정하고 후궁에서 난 왕자들 가운데 하나를 세자로 정하자는 정철의 의견은 일견 타당해 보였지만 그것은 선조 이후의 정치판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굳히겠다는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선조가 펄쩍 뛰었다.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세자를 정하자는 것은 나보고 죽으라는 말이 아니냐며 거품을 물었다. 정철은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지만 후회밖에 할 것이 없었다. 선조는 다시 동인들을 끌어들였고 그들을 이용해서 서인들을 견제했다.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동인들이 서인들을 어떻게 대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다시 동인들의 세상이 되었지만 반복되는 보복으로 인해 유능한 인재가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선조의 농간에 의해 총체적 난국에 빠진 조선이 침략을 당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는 결과였고 전쟁이 닥친 이후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도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들은 선조에게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 자에게 역적으로 몰려 목숨을 잃고 집안이 박살난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느냐만, 우리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순신의 피해가 가장 커 보일 수 있다. 자신이 이룩한 모든 영광을 한 순간에 빼앗기고 목숨까지 위태롭다가 백의종군의 치욕까지 당한데다 그 충격으로 모친까지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이만저만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나 민족을 구하였으니, 이순신이 당한 피해는 오히려 그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남은 이순신은 선조와의 싸움에서도 빛나는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선조에게 가장 피해를 본 사람은 그의 아들이자 다음의 왕이 되는 광해군이다. 그토록 세자 책봉을 싫어하던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왜적을 피하기 위해 도성을 버리기 직전이었다. 그날따라 비가 추적주척 내렸다. 왜적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던 자리에서 몹시 위급하니 세자를 책봉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선조가 기다렸다는 듯 누가 적합 하느냐고 물었다. 둘째 아들인 광해군이 가장 똑똑하고 의젓하다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광해군을 불러 내던지듯 세자로 책봉했다. 그때 광해군의 나이 불과 열일곱, 조선의 15대 군왕이 될 자격이 주어지는 자리는 너무나 처량하고 음울 했다. 불길하게 흔들리는 촛불의 그림자는 나중에 닥치게 될 한없는 불행을 예견하는 것 같았다.
선조가 그를 세자로 책봉한 것은 너는 따라오지 말라는 암시였다. 자신은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도망칠 계획인데, 누군가는 여기에 남아 왕 비슷한 노릇이라도 해주어야 했다. 거기에 선택된 것이 광해군이며 그에게 주어진 것은 망한 집안의 청지기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광해군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선조가 때어준 신하들을 이끌고 분조(分朝)의 역할을 다했다. 불안에 떨던 백성들은 침착하고 의젓한 광해군의 풍모에 감복했다. 광해군이 가는 곳마다 민심이 안정되고 자진하여 군사로 나가겠다는 장정들이 줄을 이었다. 누가 봐도 광해군은 제왕의 풍모가 있었고 전쟁이 끝난 다음 나라를 재건해 줄 것으로 크게 기대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다음 광해군은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조선에서 왕 노릇을 하게 된 선조는 광해군을 극도로 경계하고 견제했다. 제 한 몸 살겠다고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선조와 백성들과 함께 하며 풍찬노숙(風餐露宿)을 마다하지 않았던 광해군은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그도 인간인 만큼 일말의 가책은 없지 않았지만 왕이라는 좋은 자리를 내놓을 수는 없었다. 불안에 빠진 선조는 걸핏하면 광해군에게 양위(讓位)를 하겠다고 난리를 치기 일쑤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4년 후, 이만하면 상황이 안정되었다는 판단이 든 선조는 새로운 왕후를 들인다. 새로 맞이한 정식의 마누라는 광해군보다 무려 아홉 살이나 어린 열여덟의 새파란 여자였다. 그대 광해군이 받았던 충격의 강도가 어떤 것이었는지 상상하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선조가 새 마누라를 얻은 것은 시간을 버는 것과 함께 자신이 짰던 판을 뒤집기 위한 전술이었다. 광해군은 왕 노릇을 충분히 해 낼 수 있었다. 자신이 아파 누웠기라도 할 때 혹시라도 누군가가 그만 그 자리를 물려주시는 게 어떠냐고 말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 큰일이었다. 설마 그러지야 않겠지만 계속 커가는 광해군의 비중을 눌러버리기 위해서는 가장 큰 약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의 가장 큰 약점은 정식의 왕후에게서 난 왕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약점을 정면으로 공격하기 위해서는 정식의 왕후에게서 난 아들이 필요했고 그에 따라 인목왕후가 간택되게 된 것이었다. 본인부터가 후궁의 소생이었지만 그런 것에 구애받을 선조가 아니었다. 원자를 만드는 작업은 대단히 흡족했다. 이렇게 예쁘고 어리면서 쭉빵한 여자와 마음대로 즐기기 위해서라도 왕 노릇을 계속 해야만 했다. 열과 성을 다한 작업의 결과, 마침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원자가 탄생했다. 원자는 즉시 영창대군으로 봉해졌고 조정은 폭풍전야의 긴장이 감돌았다.
선조의 의중을 간파한 무리들이 어떻게 공작을 벌렸으며 나중에 즉위한 광해군이 왜 영창대군을 죽이게 되는가는 굳이 세세히 설명하지 않겠다. 광해군이 반정을 당해 몰려난 장차 세자가 될 영창대군을 옹립하여 정권을 잡으려던 서인들에 의했다기 보다는 아비인 선조 덕분이었다. 그 결과 조선은 다시 일어설 기회를 잃고 말았다. 선조가 욕심과 아집을 버리고 조금만 대의적으로 처신했다면 서인들의 반정으로 광해군이 몰려나는 최악의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극도로 피폐했던 조선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상처의 치유와 국력의 재건이 우선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량을 하나로 집중시킬 수 있어야 했는데, 광해군은 그럴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조선의 왕들 가운데 광해군만큼 백성들의 삶에 가까웠던 사례는 없었다. 백보를 양보해도 최소한 선조보다는 훨씬 나은 정치를 펼 수 있었지만 사이코패스 같은 아비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하고야 말았다. 선조의 안배에 따라 광해군을 몰아낸 소인배들이 칼자루를 잡게 되자 국력의 회복은 남의 일이 되었으며 그것이 병자호란의 국치(國恥)를 부르게 되는 것이다.
광해군의 비애는 지극히 음흉하고 야비한 아비가 이루어 낸 결과였고 그에 따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지금까지도 폭군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가장 큰 피해자 아닐 수 없다. 선조는 인간으로서도 아예 실격이었고 아비로서도 한참 낙제였으며 왕으로서도 아주 부적격한 자였다. 선조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형은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사람들이었고 그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는 그런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자에게 가장 적합한 것은 부관참시(剖棺斬屍)의 네 글자가 아닌가 싶다, 지금의 우리가 이렇게 웅크리고 살 수밖에 없는 있는 골조가 선조에게서 발원되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 이순신이 잡혀갔다!
- 조선의 왕이 이순신을 죽이려고 한다!
전쟁이 재발한지 그리 오래지 않아 일본군들이 발칵 뒤집혀졌다. 무적불패와 백전백승으로 대변되는 이순신은 그들에게 죽음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 이순신이 자신의 왕에 의해 잡혀갔다는 일대 희소식에 일본군은 계급을 가리지 않고 춤추며 날뛰었다. 어떤 대승리를 거두어도 이렇게 기쁘고 감격스럽지 않으리라, 이제는 살았다며 기뻐 날뛰는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소리 높여 칭송했다. 조선 왕을 꼬드겨 이순신을 실각시킨 고니시 유키나가의 공로는 아무리 칭송해도 부족했다. 그동안 전쟁에 소극적이었고 어떤 때는 조선과 밀통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았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단번에 구세주 급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고니시는 사약을 곱빼기로 들이킨 것처럼 쓰게 웃을 뿐이었다.
5년 전, 기세등등하게 바다를 건너온 일본의 대군은 순식간에 조선 땅의 대부분을 석권했다. 가는 곳마다 쌀과 곡식이 그득히 쌓여있었고 여자들은 늘씬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가장 가난해 보이는 집에서도 일본에서는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도자기들이 즐비한 것을 보고는 거품을 물고 졸도할 지경이었다. 그들에게 조선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었다. 모두가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잇을 때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바다였다. 바다에서는 바로 앞에서 보고서도 믿을 수 대참패의 연속이었다. 보급을 받지 못한 일본군은 명나라가 참전하고 곳곳에서 준동한 의병들이 기습마저 더해지자 처음의 당당했단 기세는 오간데 없이 거지꼴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는 부산을 위시한 경상좌도 일대에 웅크리고 지루하게 대치했다.
누구나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히데요시는 전쟁을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러다가 조선 땅에 뼈를 묻는 게 아닌가 두려웠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이순신이었다.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면서 바람과 파도를 마음대로 부리고 단칼에 수백 수천을 베어버리다가 수틀리면 천둥과 벼락을 때린다는 이순신은 사람으로 분류되지 않은지 이미 오래였다.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바다에서 이순신과 맞닥뜨린다면 그때는 어쩌겠는가? 입장을 바꾸어 자신들이 이순신이라고 생각해도 도망가는 적들을 절대 살려 보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용맹한 무사들도 이순신이라면 깜짝깜짝 놀랐고 담이 약한 자들은 그만 미쳐버리거나 스스로 목을 매기 일쑤였다.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와 자식들을 볼 수 없다는 절망감에 그들은 무릎을 감싸 안고 끅끅 울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이순신이 끌려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 이미 죽었다는 소문도 만만치 않았다 - 소식에 발광하지 않을 일본군은 없었다.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문은 이미 미쳐버린 자들마저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특효약이었다. 그들이 제정신을 차린 것도 잠시, 다시 거품을 물고 발광의 대열에 동참하여 길길이 날뛰었다.
눈이 허옇게 뒤집힌 일본군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를 지르며 군무(群舞)를 추어댈 때 이순신은 의금부의 전옥(典獄)에 갇혀 있었다. 그는 대역(大逆)을 범한 죄수로서 습하고 불결한 감옥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최강의 용장인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의금부가 아니라 한산도의 대본영(大本營)이었지만 선조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을 함거에 실어 의금부로 끌어오라는 어명이 입직승지에게 떨어진 것은 정유년(1597년) 1월 초의 밤이었다. 이순신이 압송당한 여러 가지 죄목은 "감히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겼고 적을 놓아 나라를 저버렸으며 남의 - 원균의 - 공을 빼앗은 데다 남을 - 이것도 원균과 직접 관련이 있다 - 무고하여 죄에 빠뜨렸다 - 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역시 임금을 업신여긴 것일 터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임금을 업신여긴 적이 없었고 위의 모든 죄목에 해당할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다만 말도 되지 않는 조정의 명령을 무시한 적은 있었다.
지루한 대치국면이 끝난 것은 명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배제하고 진행시킨 화평교섭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이겼다고 주장하고 서로의 주장과 요구를 들이대는 교섭이 작년(1596년) 말에 결렬됨에 따라 소강상태였던 전쟁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그에따라 일단 일본으로 철수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 정확한 일정을 전해 준 것은 바로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고니시는 전쟁에 소극적이었고 평화교섭에 주도적이어서 조선 조정에서는 매우 우호적으로 대했다. 고니시가 수하인 요시라를 통해 전해준 정보에 조정은 완전히 뒤집어 졌다. 조선에서 가장 증오하는 왜적이 바로 가토 기요마사였다. 용맹하고 호전적인 가토는 조선의 끝까지 진격했고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은 맹장 중의 맹장이었다. 그런 가토에게 증오가 쏟아지는 것은 당연했고 전쟁을 일으킨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 더욱 나쁜 왜놈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런 가토 기요마사를 잡을 수 있다면 이번 전쟁 최대의 공으로 손색이 없었다. 특히 그동안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마침내 백성들을 버리고 도주하기까지 하여 체면이 땅에 떨어졌던 높으신 분들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들이박았다. 그들은 가토 기요마사를 잡는 데 붓 하나라도 참가시키기 전력을 다했다.
조선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순신이 유일했다. 당장 출격하여 가토의 목을 가져오라는 어명이 떨어졌지만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한 마디로 개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순신에게는 적의 수작이 너무나 빤하게 보였다. 고니시가 그 정보를 주게 된 것은 대의적으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함이며 개인적으로는 가토와 회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불화한 것에 있다지만 고니시도 본질적으로 왜적이 아니던가? 아무리 사이가 나쁘다고 해도 가토를 조선에게 바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가장 용맹한 가토 기요마사가 죽는 날에는 일본군은 파도 맞은 모래 둑처럼 와르르 붕괴되겠지만 그 가운데는 고니시 유키나가도 포함될 것이 뻔했다. 자신이 살기위해서라도 가토를 넘겨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고니시 유키나가 쯤이나 되는 최고지휘관이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동료를 적에게 넘겨줄 정도라면 전쟁은 진즉에 끝났을 것이 분명했다. 백보를 양보해서 고니시의 정보가 신빙성이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적의 입에서 나온 것인 만큼 일단은 의심해보는 것이 정상적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어서 나가 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가져오지 못하겠느냐고 안달 해댈 뿐, 누구도 상식에 입각하지 않았다.
고니시의 정보에 의거하여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러 나갔다가는 함정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었다. 가토가 이용할 부산과 쓰시마를 잇는 축선은 확고한 일본의 영역이었다. 일본군은 임진년 이래 경상좌도 해안과 섬의 곳곳에 강력한 요새를 구축해 놓았다. 소굴에 굳게 틀어박힌 적들은 천하의 이순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놈들을 박멸하려면 우선 육군이 공격하여 고름 짜내듯 바다로 몰아내야 했다, 그 다음에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육군에게 그럴 역량 자체가 없었다. 부산의 적을 소탕하라는 명령이 내려진지 이미 여러 차례였지만 그것은 명령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했다. 5년 전인 임진년 9월에 부산포를 강습하여 200척애 달하는 적 함대를 박살내었지만 그 이상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했다. 이후에 적의 요새와 방어력은 더욱 강해졌다. 아무리 가토를 잡기 위해서라고 해도 그곳에 들어갔다가는 무사하기 어려웠다. 가토와 약속이라도 하여 정확한 시간에 마주치지 않는 한, 그쪽으로 출격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진배가 없었다. 그것은 조선의 유일한 버팀목인 이순신과 무적의 함대를 끌어내어 섬멸하겠다는 적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하기야 원숭이 같은 왜놈들이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서 무슨 짓을 못할까마는, 그것을 그대로 대변하고 오히려 한 술 더 뜨는 놈들은 참으로 경멸스러웠다.
오직 적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개소리 일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이 개소리를 무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개소리를 짖어대는 자들의 두목이 바로 조선의 왕이라는 것이었다. 선조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업신여긴 이순신을 잡아들이고 말았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임명된 자는 선조가 가장 사랑하는 원균이었다. 원균은 이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 것을 가장 크게 성토한 자 가운데 하나였다. 자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겨주면 당장 나가 가토 기요마사는 물론, 단숨에 부산을 회복하겠노라고 기염을 토하던 원균은 마침내 소원을 이루고야 말았다. 선조는 당장 이순신을 죽이려고 들었지만 원로대신인 정탁이 죽음을 각오하고 만류했다. 뜻을 이루지 못한 선조가 다음으로 노린 것은 이순신을 폐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감히 조정을 기망하고 임금을 업신여긴 대역죄를 모의한 배후를 대라며 고문을 가했지만 이순신은 입을 열지 않았다. 보다 못한 중신 - 이순신과 같은 당파의 - 들이 읍소하여 일단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 보내져 백의종군에 처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김덕령(金德齡)의 전철을 밟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분연히 거병하여 여러 차례 왜적을 격파한 김덕령은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선조는 김덕령을 역모를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잡아들여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그때도 정탁이 간곡히 아뢰어 죽음을 면한 다음 권율의 휘하로 보내졌지만 거기에서 필설로 형용하지 못할 고문을 당한 끝에 마침내 원귀가 되지 않았던가? 그런 충신들을 잡아 죽이는 게 특기였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것 밖에 없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이순신은 약간 더 살려둘 필요가 있었다. 죽음의 유예기간은 선조가 그토록 신임하는 원균이 기대에 부응할 때까지였다. 원균이 제대로 싸워주거나 최소한 실망시키지 않는다면 이순신은 존재가치가 없었다. 혹시라도 그렇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이순신을 살려둔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원균이 희대의 지략과 용맹을 발휘하여 완벽하게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이순신이 길러놓은 천하무적의 함대가 적들에게 베어지는 병사들의 비명과 함께 처참하게 사라져버렸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닿았을 때, 모든 신하들은 당파를 초월하여 그저 멍하게 천정만 바라볼 뿐이었다. 패배해도 어쩌면 그렇게 완벽하게 패배할 수 있는 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때 선조는 원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원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부하장수들이 비겁해서 그런 것이니 당장 그놈들을 잡아들여 처단하라”고 외칠 따름이었다. 과연 선조는 청사에 길이 남을 명군이었다.
여기서 당시의 조정 분위기를 짚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으리라, 전쟁 전에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가 정여립의 모반으로 인해 서인이 잡았던 주도권이 정철의 건저를 계기로 다시 동인으로 넘어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가 있다. 동인은 다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리게 되는데, 서인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던 측이 북인이 되고 일단 나라를 추스려야 하니 가급적이면 온건하게 처리하자는 측이 남인이 된다. 물론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와 아메바는 비슷한 점이 많은데 틈만 나면 분열한다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일 테니까,
북인의 영수는 이산해였으며 남인의 리더는 유성룡이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이산해의 입지가 크게 좁아지게 된다. 그 이유는 전쟁 전에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通信士)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을 정탐하러 보낸 통신사의 정사(正使) 황윤길은 서인이었고 부사(副使)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그들은 앙숙답게 보고도 정반대였다. 황윤길이 전쟁의 우려가 크다는 보고를 낸 반면, 김성일은 전혀 그럴 기미가 없다고 잘라버렸다. 김성일은 매우 과격한 인물로서 카리스마가 대단했다는데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인물이 쥐새끼 같고 경륜이라고는 아예 없기 때문에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자 그쪽으로 끌리는 사람이 많았다. 선조도 김성일의 주장에 기울었는데, 황윤길의 의견을 채택하면 전쟁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을 기피하고 싶은 것은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선조가 김성일의 주장이 받아들였다기보다는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개인적 의사를 표현한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전혀 전쟁에 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발발하였고 그렇게 된 이상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동인들이 욕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이미 남인과 북인으로 갈려 있었지만 당시 정책결정자 가운데 고위직을 동인이 독점했던 만큼 도의적인 책임이나마 져야 했다. 처음에는 워낙 사정이 급하다보니 그렇게 좋아하던 당파싸움조차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가만있으면 선조가 아니다. 정신없이 도망치다 압록강이 지척인 의주까지 이른 선조가 시 한 수를 읊는 데,
國事蒼黃日 誰能 李郭忠 나라는 갈팡질팡 어지러운데 뉘라서 나라건질 충신이될꼬
去 存大計 恢復杖 諸公 서울을 떠난 것은 큰 계획이요, 회복은 그대들에게 달려 있나니
痛哭關山月 傷心鴨水風 국경이라 달 아래 소리쳐 울고 압록강 강바람에 마음 상하네
朝臣今日後 尙可更西東 신하들아 오늘이 지난 뒤에도 또 다시 동인 서인 싸우려느냐
참으로 명언이 아닐 수 없다.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 간 것은 큰 계획을 위해서인데 그것을 성사시킬 사람은 그대들이며, 당파싸움을 일으킨 자가 바로 자신이거늘 이래도 동인서인 싸우려느냐고 책임을 전가하는 데는 그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각설하고, 전쟁 중의 당파 간 세력균형은 전쟁의 양상과 매우 밀접했다. 유성룡이 영수로 있는 남인이 득세한 것은 전쟁의 주도권이 명나라에 있고 정치와 행정, 실무에 모두 유능한 유성룡이 필요했으며, 명나라와 일본이 협상을 시작함에 따라 남인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현실적 주장을 펼친 것이 주효했다. 거기에 같은 당파인 이순신이 대활약을 펼친 것도 상당한 영향이 있다 할 것이다. 그에 비해 윤두수를 필두로 하는 서인이 강경한 논조를 띌 수밖에 없는 것은 정치적 소수세력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봐야 하겠다. 나름대로 평온하던(?) 정치판은 명나라와 일본의 협상이 깨어짐에 따라 급격하게 변한다. 다시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됨에 따라 강경파들이 득세할 여지가 조성된 것이다. 그나마 현실에 기반 된 주장을 하던 남인들은 입이 막혔고 왜놈들을 모조리 때려잡자는 감성적 발언이 넘쳐흘렀다. 애초부터 입만 있던 그 바닥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초특급 정보를 집어넣자 완전히 미쳐 돌아가게 되었다. 특히 선조는 광적으로 가토 기요마사에게 집착했다. 침략의 상징적 인물인 가토를 잡으면 지금까지의 뻘짓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을 마친 선조는 미친 듯이 이순신을 닦달했다. 이순신이 가토를 잡아준다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선조의 공이 되는 것이었다. 비열하고 뻔뻔하기로는 따를 자가 없는 선조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판단이었지만 이순신이 그것을 무시해버리자 그만 눈이 돌아버리고야 말았다.
선조가 이순신을 죽일 것 같다는 여론이 형성되자 거기에 편승하고 부추키는 자들이 나타나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자들이 야합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다음 편은 이순신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히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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