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7.24 19:31
수정 : 2006.07.24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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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 축대옹벽 공사에 쓸 보강토를 캐기위해 굴착기로 파괴된 광주 관음리 백자 가마터(사적 312호). 옹벽 바로 옆 둔덕에 크게 패인 곳이 파괴된 가마터다. 맨 위쪽 부분만 조금 남고 대부분이 날아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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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광주 사적지…도자기 파편 축대 보강토로 둔갑
시, 업주 고발커녕 알고도 두달 지나 문화재청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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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유적이 장마 때 방수포로 덮여있는 광경과 유적 폐허 부근에서 뒹굴고 있는 갑발과 왕실용 도자기 조각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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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문화재청 사적과는 경기도 광주시청에서 날아온 보고서 한통에 비상이 걸렸다. 국가 사적(314호)인 광주시 퇴촌면 관음리 176-17 야산의 16세기 백자 가마터를 건설업자가 파헤쳐 쑥밭으로 만들었다는 급보였다.
다음날 현장 조사에 나선 사적과 직원들은 망연자실했다. 가마터에서 굴삭기로 마구 파낸 도자기, 가마 벽체 조각들이 흙덩이에 섞여 바로 옆 전원주택터 축대 옹벽 뒤편을 채운 보강토로 둔갑해 있었다. 바로 옆으로 높이 5~6m정도 되는 100여평 정도의 가마터 퇴적층이 칼로 도려낸 듯 잘려져 나갔다. 주위에는 진흙 갑발(고급 도자기를 구을 때 씌우는 큰 그릇), 가마 벽체 덩어리, 명문이 새겨진 백자 조각들, 도지미(굽받침) 등이 나뒹굴었다.
확인 결과 사고가 일어난 건 5월5일. 시쪽이 현장을 확인한 것은 닷새 뒤였고, 두 달 넘게 팔짱을 끼고 있다가 문화재청에 뒤늦게 보고했다. 문화재보호법상 국가 문화재를 불법 현상변경하는 것은 최고 징역 5년, 벌금 5천만원의 형사범죄지만 시쪽은 업주를 고발하기는 커녕, 현장 보존조처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적과 직원은 “시 담당 직원이 실수로 깜빡 잊고 있었다고 말해 어이가 없었다”고 혀를 찼다. 청쪽은 현장 조사 다음날 △ 업주 고발 △ 응급 보존조치 △ 옹벽에 들어간 가마터 파편 등의 원상복구 등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폭우가 쏟아진 16일 취재진이 확인한 결과 옹벽 속에 채워넣은 가마터의 도자기 파편들은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다. 파괴된 가마터는 방수포 하나만 덮은 채 빗물이 스며들어 붕괴 위험에 놓여있었다. 가마터 폐허에서는 흙물과 함께 도자기 조각들이 끊임없이 쓸려 내려왔다. 현장을 본 나선화 이대 박물관 학예연구관은 “파괴된 가마터는 16세기 조선 초기 백자 전성기 때 운영된 왕실 관요”라며 “고급백자를 넣는 갑발이 무더기로 나온 것으로 미뤄 가마 중에서도 한두개밖에 없는 어용지기(임금에게 진상하는 그릇)를 생산하던 곳”라고 말했다. 업주는 “가마터인줄 몰랐고, 공사용 흙이 필요해 토지 소유주의 허락 아래 판 것”이라고 변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시는 14일에야 업자를 경찰에 고발했다.
파괴된 사적가마터와 도자 유물 산포지 사이에 낀 문제의 택지(1800여평)에 현상변경 허가가 떨어진 건 2004년 12월. 이 지역에 전원주택터를 닦게 해달라는 업자의 신청을 받은 광주시쪽은 경기도 문화재위원 등 전문가 3명에게 영향평가 조사를 맡겼다. 이들은 약식 조사 뒤 택지 개발터에 유물이 없으니 옹벽 등을 지어도 좋다고 허가를 내렸다. 문화재청쪽은 “문화재위원회에서도 사적 바로 옆 땅의 경우 파괴 우려가 커서 현상 변경 허가를 내주지 않는 것이 당연한 불문율”이라고 말했다. 당시 도 문화재위원으로 허가를 내준 최건 경기 관요박물관장은 “광주에 도요지 사적이 많아 원칙대로 불허하면 새 집을 지을 수 없는 상황을 감안했던 것인데, 정말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고 해명했다. 학계에서는 업자도 문제지만, 사적지 바로 옆의 개발 행위를 허가한 일부 전문가들의 안일한 대처가 더 큰 참화를 불렀다고 입을 모았다.
경기도 광주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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