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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27 20:33 수정 : 2006.07.28 15:36

장세진/평론가, 전주공업고교 교사

나는 이렇게 읽었다/한강

1998년 5월15일부터 <한겨레>에 연재를 시작한 <한강>은 2002년 2월 10권의 단행본으로 완간되었다. <한강>은 이승만 자유당정권이 말기적 증상을 나타내던 1959년부터 유신독재로 종신대통령을 노린 박정희가 심복의 총에 맞아 죽으며 생겨난 이른바 ‘서울의 봄’을 엄혹한 겨울로 몰아간 신군부의 광주민중항쟁탄압 직전인 1980년 5월까지의 ‘한국적 상황’을 유일민·일표 형제를 비롯한 수많은 민중이 어떻게 찢기고 부대끼며 살아왔는지를 그린 대하소설이다.

작가 조정래는 <한강> 완간 뒤에 한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문학은 이긴 자들의 기록에서 빠져 있는 부분, 즉 기록된 역사의 부당성을 인간적인 면을 통해 파헤치는 분야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일을 재구성하는 일이죠.”(<중앙일보> 2002.2.7.)라고 말했다. “역사학과 소설은 어떻게 다르고 같아야 합니까?”라는 기자 질문에 대한 답중 일부이다. 이를테면 문학은 역사의 그늘에 묻혀버린 대다수 민초들의 삶을 복원해내는 것인 셈이다. 역사가 박제된 사실로 말이 없는 것이라면 문학은 그것을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력으로 승화시켜내는 작업이라는 뜻과도 통할 터이다. 바로 대하소설이 갖는 문학적 힘이다.

당연히 문학적 힘이란 허구적 세계임을 전제한 것이지만, 대하소설의 경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한다는 점에서 인식이나 감동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예컨대 5·16 쿠데타 때문에 한 50년쯤 이 땅의 민주주의가 퇴보의 길을 걸었다는 인식을 단순히 역사만 가지고 이렇듯 ‘온몸으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미치고 뒤틀린 그 시절 수많은 사람이 독재정권에 의해 찢기고 할퀴는 모습을 대하면서 느끼는 ‘소름끼치는’ 감동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문학은 위대할 수밖에 없다. 조정래 대하소설 3부작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이 기록한 1천 만부 판매는 단적인 예지만, 그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다.

<한강>이 문학사적으로 우뚝 서는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역사의 현재성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 이르러 친일진상규명법을 비롯한 과거사 진상 밝히기가 정치적 화두가 되었지만, 다시 ‘그놈의’ 경제에 발목잡히는 형국은 <한강>을 읽은 많은 독자들을 화나게 한다. “아니, 그래도 속 후련하게 하는 건 문학밖에 없다니까.”라는 자위를 하며 새삼 <한강>을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역사가 단순히 지나가버린 과거지사만은 아니라는 깨우침을 갖게 하는 대하소설 <한강>의 힘은, 그래서 남달라 보인다. <한강>은 30, 40년 전의 역사를 현재에 머물게 해 이 땅의 미래를 제시한다. 이를테면 <한강>은 미래를 여는 열쇠이기도 한 셈이다.

<한강>이 더욱 믿음이 가는 것은 이런저런 재미의 요소들을 거느려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점이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훌륭한 주제의식만으로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독자들에게 별로 읽히지 않는 대하소설이 더러 있다는 사실과 관련해서도 <한강>의 문학으로서의 힘은 빛나 보인다. 정작 안타깝고도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국민의 수준과는 따로 노는 이 땅의 분단현실이다. <한강>은 도대체 언제쯤이나 대하소설이 필요 없는 사회, 대한민국이 될지를 되묻게 한다. 말할나위없이 이것 역시 대하소설 <한강>의 힘이다.

장세진/평론가, 전주공업고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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