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7.27 21:14
수정 : 2006.07.28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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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
이응준 지음. 문학동네 펴냄. 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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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36)씨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출발한 작가다. 시로 등단한 게 갓 스물이던 1990년, 소설은 그보다 4년 뒤였다. 다시 그 이태 뒤에는 첫 소설집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과 장편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을 거의 동시에 내놓았다. 두 권의 시집과 세 권의 소설집, 다시 두 권의 장편이 이응준씨의 그간의 소출이었다. 어언 십여 년. 새롭게 내놓은 <약혼>(문학동네)은 네 번째 소설집이 된다.
아홉 단편이 묶인 소설집 <약혼>의 주제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떤 책의 주제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주제가 삶과 인간이라는 것만큼이나 허무한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말을 바꾸어서, 소설집 <약혼>이 사랑을 소재로 삼고 있다고 해 두자. 아닌 게 아니라 수록된 작품들은 한결같이 이런저런 형태의 사랑을 다루고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는 일종의 테마 소설집이라 할 수도 있다.
이응준씨의 사랑 소재 소설들이 많은 경우 죽음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그러니까 사랑과 죽음이다. 역시 유구한 문학적 화두. 중요한 것은 작가가 사랑과 죽음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일 게다. 작품집 맨 앞에 실린 <내 어둠에서 싹튼 것>에는 한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애인이 된 지 칠 일째 새벽에 자살”한 여자가 나온다. 이 경우 사랑과 죽음이 어떤 함수관계에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당사자인 남자는 물론 독자인 우리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작가조차 알지 못했던 것 아닐까. 그만큼 불가사의한 것이 사랑과 죽음이라는 뜻. 절친한 친구의 애인을 가로챈 남자(<약혼>), 폐암 말기를 선고받고 두려움에 떠는 남자에 앞서 극약을 마신 애인(<어둠에 갇혀 너를 생각하기>), 내일이면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초등학교 동창생 여자를 버려두고 또 다른 동창에게 청혼하는 남자(<황성옛터>), 사생아로 태어난 자신의 딸은 고아원에 맡겨둔 채 엉뚱한 사내아이를 아들처럼 돌보는 목사(<나의 포도주와 그의 포도나무들>) 등에게서 사랑과 죽음은 극적이지만 혼란스러운 춤을 추는 듯하다.
사랑과 죽음을 포함한 생의 중요한 사건과 국면들에 대해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지 않은 채 무심한 듯 건너뛰거나 실언인 것처럼 힌트를 제공하는 것이 이응준 소설의 두드러진 서술 방식이다. 감상주의와 무거운 심각함에 빠지지 않고 어디까지나 거리를 두고 서술하는 그런 태도야말로 소설집 <약혼>의 바탕을 이루는 핵심이라 할 법하다. 그리고 그런 특징을 ‘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황성옛터>의 주인공은 무언극 마임 배우. 마임의 세계적 스타 마르셀 마르소를 빌려 ‘연극과 영화는 소설이요, 마임은 시’라는 견해를 제출한다. 침묵과 생략을 즐겨 구사하는 이응준 소설의 문법은 그런 의미에서 소설보다는 시에 가깝다. 시를 먼저 쓰기 시작했던 이력을 반영하듯 시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문장들이 또한 그런 특성을 효과적으로 거든다: “그를 살해한 것은 서툰 희망이고 사인은 오염된 고독이다.”(<내 어둠에서 싹튼 것>), “나는 구겨진 그림엽서일 뿐이다. 하지만 작은 우표 한 장만 품어도 땅 끝에 숨어 있는 힌두어 같은 너에게까지 전해진다.”(<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물론 그 목표란, 무언극 속에서 허송세월하고 있는 나라는 그림자에게 현실의 사찰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것이리라.”(<황성옛터>)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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