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스시 전집’ 제4권 <테하누>
어슐러 르 귄 지음. 최준영·이지연 옮김. 황금가지 펴냄. 1만1000원 |
‘반지의 제왕’ 틀 따르지 않은 르 귄의 독특한 판타지
타인을 정복하지 않고 내적 성찰 통한 자아극복 초점
철학적 고민과 풍부한 은유…신화 보편문법을 문학으로 승화
어슐러 크뢰버 르 귄(1929~ )은 인류학자인 아버지와, 작가이자 정신분석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디 르 귄은 과학소설로 명성을 얻었는데, 아주 먼 미래 인류가 세운 우주 연합 ‘헤인’을 중심으로 한 연작들로 독자와 평론가에게 모두 인정받았다. ‘헤인 시리즈’ 가운데 그의 대표작은 <어둠의 왼손>(시공사, 2002)과 <빼앗긴 자들>(황금가지, 2002)로 두 번이나 휴고 상과 네뷸러 상을 동시에 안았다. 두 작품의 특징이라면 과학소설이면서 문학성이 풍부한 우화적 감수성을 품고 있다는 것, 동시에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두 작품은 또한 페미니즘 과학소설의 대표작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르 귄은 두 작품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보여주되 그에 대한 해답을 내놓기보다는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상호간의 이해를 강조한다.
르 귄의 왼손에 ‘헤인 시리즈’가 있다면, 오른손에는 ‘어스시 연대기’가 있다. ‘헤인 시리즈’가 그를 유명하게 만들기는 했으나 과학과 종교와 삶과 죽음과 성적(性的) 차이 등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가볍게 읽히지는 않는다. 그에 반해 좀 더 대중적으로 폭넓게 다가선 것이 바로 ‘어스시 연대기’이다. ‘어스시(Earthsea)’는 넓은 바다와 무수한 섬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이름. 용이 하늘과 바다를 가르고, 마법이 땅 위에서 숨을 쉬는 이곳에서 전설적인 대마법사로 알려진 게드의 모험담이 펼쳐진다.
르 귄의 과학소설이 인류학적 사색과 사회과학적 이성에 근거하고 있다면, 그의 판타지는 철학과 신화의 심리적 접근을 꾀한다. 그의 과학소설이 다분히 사회와 인류에 관한 외적 문제에 관심을 두는 반면, 그의 판타지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내적 고민을 품에 안고 있다.
‘걸작의 해악’ 모험담의 전형화
판타지는 흔히 ‘검과 마법의 이야기’로 불린다. 검을 든 기사와 마법사가 마치 전형처럼 굳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톨킨이 <반지의 제왕>에서 보여준 완벽한 세계의 탓이 크다. 전사와 난쟁이와 엘프와 마법사 등의 다양한 종족과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파티’(party, 판타지에서 모험의 여정을 함께하는 무리를 일컫는다)를 이루어 끊임없이 출몰하는 적들을 물리치고 마지막에 가장 강력한 적을 무찔러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다는 구성은 지금까지도 규칙처럼 지켜지곤 한다. 장르 자체에 끼친 <반지의 제왕>의 영향은 ‘걸작의 해악’이라고 부를 정도로 강력한 것이어서, 뒤의 판타지들이 모두 톨킨이 완성한 세계의 틀 안에 갇혀 버렸다.
|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 제4권 <테하누>가 번역 출간되었다. 사진은 ‘어스시 시리즈’를 원작으로 삼아 일본 ‘스튜디오 지브리’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게드전기>의 한 장면. ㈜대원디지털엔터테인먼트 제공
|
어스시의 마법은 ‘언어’의 주술적인 힘에 바탕을 둔다. 만물은 각자 자신의 진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 대상에 마법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진짜 이름을 알아야 한다. 진짜 이름을 안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꿰뚫고 지배할 능력을 얻는다는 것, 진짜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전적으로 상대를 믿고 자신의 알몸을 맡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계의 마법은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언어’의 주술적 힘과 정확하게 같은 맥락을 갖는다. 고대 주술사들은 말에 혼과 힘이 있다고 믿었으며, 나와 대상을 잇는 가장 강력한 사슬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환자에게 약초를 사용할 때조차 약초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효력을 끌어내지 못했다.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에서도 그러지 않았는가. 주인공 바스티안은 ‘어린 여제’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환상 세계를 구한다. 설정을 이해하는 것은 판타지를 읽는 데 기본이 된다. 작가가 창조하고 구성한 세계의 설정과 세계관에는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판타지는 자신만의 세계가 있고, 주인공들은 그 세계의 규칙에 걸맞은 길을 찾아야 한다. 독자들은 주인공과 함께 경험하고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를 쌓아 나감으로써 성장하여 결국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과 자신을 함께 구원한다. 그렇기에 모든 판타지는 영웅담이자 성장 소설이다. 어스시 연작은 <반지의 제왕>에서 벌어지는 장쾌한 전투나 마법사들의 화려한 마법 대결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모르고스나 사우론과 같은 절대악의 타도를 중심에 두지도 않는다. 싸워야 할 대상은 오직 자신. 내적 성찰과 시련을 통한 자아 극복에 초점을 맞출 뿐, 타인과의 투쟁이나 정복을 통해 목적을 성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대마법사 게드뿐 아니라 <머나먼 바닷가>에 등장하는 아렌 왕자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담담하다 싶을 정도의 모험담은, 그래서 그간의 검과 마법에 길들여진 독자들에게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반지의 제왕>이 촘촘하게 짜인 세계 안에서 인물들이 장기판의 말처럼 축소되어 표현된 데 반해, 어스시 연작은 각각의 인물들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하여 한 명 한 명이 어떻게 세계의 안에서 역할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독자의 감성에 호소하는 힘은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 고전 반열 오른 세계 3대 판타지 작가가 청소년을 위한 원고를 써 달라는 청탁을 받고 집필한 작품인 만큼 어느 정도는 교훈적이지만, 작품에 내재된 철학적 고민과 풍부한 은유적 상징들은 가벼이 여길 바가 아니다. 조지프 캠벨 선생은 “신화는 집단의 꿈이요, 꿈은 개인의 신화”라고 했던가. 르 귄의 이 작품이야말로 신화의 보편적인 문법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끌어와 문학으로 승화시킨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해외 팬들 사이에서 “장르문학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일순위에 오를” 사람으로 어슐러 르 귄을 지목하고는 하는데, 이 말은 그가 문학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서양 판타지이면서도 동양적인 사상과 소수의 시선을 강조한 모험 판타지 어스시 연작은 굳이 ‘세계 3대 판타지’라는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미 그 자체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한여름 무더위에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스릴러나 스펙터클한 판타지는 시원한 청량음료 같아 자꾸 찾게 된다. 하지만 르 귄의 어스시 세계를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거닐고 나면 따뜻하고 향기 좋은 차 한잔을 마신 듯 상쾌한 여운이 길게 남는다. 임지호/북스피어 편집장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