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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03 20:37 수정 : 2006.08.04 14:30

조선의 문화공간 1·2·3·4
이종묵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각권 2만~2만3000원

고서 속 시문 따라 10년간 명인들의 땅 순례
“산수는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야 드러나”
그들이 아끼고 사랑한 공간의 기억 재생

마음은 시를 빌어 말할 수 있고 소설은 인물을 빌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가의 풍경, 마을 어귀의 고목, 이끼 낀 골짜기는 말과 친숙하지 않다. 하나의 이름이나 한 장의 사진에 담겨지면서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기 쉽다. 한 컷의 풍경으로 존재하면서, 포장도로에 묻히는 옛길처럼 가뭇없이 사라져가곤 한다.

이종묵 교수(서울대 국문과)가 쓴 <조선의 문화공간>(전4책)이 세상에 나왔다. 고목이 그렇듯, 인생과 역사도 시간을 타고 흔들리다 보면 풍경처럼 정지하다 이내 망각으로 빠져든다. 사랑했던 어머니의 주검도 때가 되면 보내고 가지 않던가? 하지만 이 책은 풍경에 혀를 달고 땅에 입을 붙여 스스로가 재생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조선시대 문인의 땅과 삶에 대한 문화사’라는 부제 그대로, 묻혀져 가는 조선 땅의 풍경들로부터 조선의 문화사를 구현해내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500년의 역사를 포괄한다. 그러면서 각 시대를 풍미했던 사대부 87인 및 그들과 교감했던 1872인의 자취를 드러내어 조선이 잉태하고 성장시킨 풍경의 대하(大河)를 그렸다. 옛것을 좋아하는 저자는 지난 10년간 고서 속의 옛 시문을 읽어가며 사라지지 말아야 할 사람의 땅을 찾아 즐겁게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송나라의 양만리(楊萬里)가 “내 사는 곳에 산이 없었던 적은 있지만 내 눈에 산이 없었던 적은 없다”고 했던 것처럼, 그도 조선의 땅과 사람을 시야에서 거둔 적이 없었던 듯하다.

땅과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은 지역에 따라 편차를 정하는 여행안내서의 격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 대신, 처한 환경과 시대에 따라 사랑한 땅과 살아간 방식이 다름을 존중하여 시대에 따라 권을 나누고 처지에 따라 장을 엮는다. 시대의 환경에 대응한 땅의 빛깔과 인간의 저력을 문화공간을 이해하는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제1책 ‘조선초기-태평성세와 그 균열’에서는 조선 개국 후의 성세에서부터 사화로 인한 유배시대까지를 다룬다. 도성에 끌어들인 산수와 성 바깥 한강변의 누정, 유배지의 풍정과 강학공간의 절조가 차례로 드러나면서 조선초기에 부상한 문화공간과 그 의미를 짚는다. 제2책 ‘조선중기-귀거래와 안분’에서는 선조대에서 광해군대까지를 대상으로 삼는다. 자의와 타의에 의한 귀거래, 그리고 그곳에서 수양과 풍류를 이룬 명사들의 현장을 찾는다. 제3책 ‘조선중기-나아감과 물러남’에서는 광해군과 인조대에 영욕을 거친 문인과 이후 17세기 사상계와 문화계를 주도한 명인들의 땅을 탐방한다. 공간을 빌어 시대의 파란과 인간의 운명을 함께 전한다. 제4책 ‘조선후기-내가 좋아 사는 삶’은 18~19세기에 문학, 학문, 예술을 빛낸 문인들의 이야기다. 벌열가의 화려한 원림에서부터 예술가의 궁벽한 땅에 이르기까지, 학문과 예술로서 채워나간 소망과 투혼의 현장을 답사한다.

87인 사대부와 풍경의 ‘대하소설’


압구청상. 그림 왼쪽 위의 이 글은 아무 욕심이 없어 갈매기와 벗이 되는 압구정에서 맑은 경치를 즐긴다는 뜻. 김석신의 작품. 세조·예종·성종 세 임금을 섬긴 권신 한명회는 지금의 동호대교 남쪽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들어선 자리에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신숙주, 서거정, 권람 등과 자주 어울렸다. 휴머니스트 제공
책은 만나고 싶은 시대와 명인, 그들이 아끼며 살다간 공간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87인의 자취가 용해된 조선의 옛 문화공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조선 500년의 문화공간이 시대의 물결과 더불어 출렁이고, 도처에서 도전과 좌절, 절망과 꿈을 펼친 옛 사람의 자취를 읽는다. 저자는 이산해를 따라 평해로 유배를 떠나고 이광사를 따라 신지도의 슬픈 섬에 발을 디뎠으며, 이제는 우리 시야에서 그 흔적을 거두어 가는 숱한 유허들을 몸소 살폈다. 소나무 한 그루를 마당에 심어 그 솔바람 소리로 얼룩진 시대를 씻으려 했던 성수침의 청송당(聽松堂)이나, 나무 끝에서 새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눈 김수증(金壽增)의 곡운정사(谷雲精舍)는 빼곡한 건물과 무장한 철조망에 밀려나는 중이다. 그런 곳에 닿을수록 기억의 끈을 놓치지 않아야 그들의 꿈도 복원할 수 있으리라는 저자의 믿음이 절실히 다가온다.

희대의 명인들이 멍들고 아끼고 사랑한 명소들인지라, 이 책에는 저자가 보탠 공간에 대한 정밀한 고증과 상세한 정보 외에도, 고인들이 뽑아낸 명언과 청담이 가득하다. 땅 한 자리, 방 한 칸에 붙인 이름은 예사롭지 않는 내력을 담았으며, 그곳에서 쓰여진 시문들은 시대가 달라져도 사라질 수 없는 향기를 발한다. 글은 사람을, 그리고 과거를 기억하게 한다고 한 저자의 말은 부질없는 것이 아니다. 장혼(張混)의 말처럼 “아름다움은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빛이 나며(美不自美 因人而彰)”, 소세양(蘇世讓)의 감회처럼 “산수는 천지간의 무정한 사물이니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야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무릇 자기 자리와 자기 이름 그리고 자기의 역사를 잃어 가는 것들은 슬픈 표정을 짓는다. 그 슬픈 표정을 모두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저자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저 앞 시대가 이룬 문화의 담장을 따라 걸으면서 마음을 다해 문명의 빛을 보려 노력했다. 우리 조상들이 사랑한 삶에 대한 기억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우리 현대인들이 상상의 정원을 꾸밀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누대와 정자, 정원과 계곡, 마을과 석굴을 찾아다니느라 세월을 아낌없이 투여했던 것은, 이 땅에 생동하는 이름을 소생시키기 위한 저자의 염원이었을 것이다.

흔적 거두어가는 숱한 옛터

산이 좋아 산에 사는 사람은 그 혀끝도 파랗게 물든다고 했다. 조선후기 홍만종이 지은 시 구절 “산은 산 사람의 혀끝에서 푸르다(山在山人舌上靑)”고 한 것이 그런 뜻이다. 산 사람이 찾아와 산 자랑을 하는데, 하염없이 부러운 홍만종의 눈에는 산 사람의 혀까지 청산처럼 푸르게 보였다는 것이다. 저자 이종묵 교수가 언젠가 이 구절이 묘하다고 하더니, 아마도 그 때 그의 몸은 조선의 문화공간으로 물들어가고 있었을 듯하다. 그것을 바라보는 필자는 지금 홍만종의 흠모에 동감하며 산으로 가고 싶다. 산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이 산행이 상쾌하고 벅찰 것이라 믿는다.

김동준/동덕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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