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조선인 혁명가가 있었다. 15살의 나이로 집을 나와 만주 삼원보, 상하이, 광둥, 베이징, 엔안등 중국 전역을 누비며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마지막엔 사회주의자로써 조선독립과 혁명을 위해 싸우다간 이가 있었다.
한 여류 작가가 있었다. 사회주의의 이상과 중국 혁명을 사랑하여 중국 혁명가들의 일대기를 기록하는데 평생을 바쳤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조선의 금강산을, 그 땅에서 온 이름 없는 혁명가를 평생 가슴에 담아둔 이가 있었다.
<아리랑>은 김산(본명은 장지락, 김산이라는 이름은 님 웨일스가 금강산에서 따온 가명이다.)과 님 웨일스(<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인 에드가 스노의 부인)라는 이름을 가진 이 두사람의 엔안에서의 운명적인 만남을 계기로 탄생한 조선 혁명과 민족해방운동의 살아있는 기록이다.
<아리랑>을 통해 우리가 만나게 되는 김산의 삶은 가히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의 성숙과정을 압축한 것과 같다.
3.1운동의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김산은 15살의 나이로 집을 나와 처음엔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한다. 그러나 곧 신지식의 원천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에 모스크바 유학을 결심하고 만주 하얼빈으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에 간섭하기 위해 일본이 시베리아로 출병하는 바람에 모스크바행을 단념할 수밖에 없게 된 김산은 천신만고 끝에 만주 삼원보의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갔다. 이시형등 민족주의자들이 세운 이 학교는 입학 연령을 18세 이상으로 정해놓고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온갖 고생을 마다하고 학교를 찾아온 김산을 가상히 여겨 입학을 허락하게 된다.
학교를 마치고 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김산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기 위해 당시 많은 독립 투사들이 그러하듯 상하이 임시정부로 향했다. 그곳에서 <독립신문>의 식자공으로 일하며 김산은 이광수, 이동휘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라 밝힌 안창호를 만난다. 하지만 곧 김산은 무정부주의와 테러 행동에 열광하게 되고 자신의 선배 혁명가인 의열단 영수 김약산과 오성륜을 만나 그들의 친구가 되어 무정부주의자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게 된다.
김산은 의열단원들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사회는 때때로 가장 온화한 사람들 중에서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삼으려고 하는 가장 열렬 한 개인적 영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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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당시 김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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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의 무정부주의적 테러 활동은 곧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많은 무정부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보다 조직적인 투쟁에 나서게 된다. 김산 역시 1921년 사회주의자가 되는데 여기에는 베이징에서 만난 ‘금강산의 붉은 승려’ 김충창(본명 김성숙)의 영향이 컸다. 김충창에 의해 사회주의에 경도된 김산은 그와 함께 쑨원의 국민당 정부가 세워진 광둥에서 조선혁명청년연맹을 결성하고, 김약산과 일본군 대장 다나카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후 체포되었다 탈출한 오성륜도 광둥에 도착하여 황포군관학교에 몸담는다. 드디어 군벌 타도를 위해 제1차 국공합작에 의한 북벌전쟁이 시작되고 수많은 조선인 혁명가들이 여기에 참여한다. 이들은 머지않아 조선 땅으로 진격하여 일제를 축출할 수 있을 거라는 꿈에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로 국공합작은 결렬되고 장제스와 국민당의 반혁명적 행위로 인해 이들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김산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모든 세계가 무너졌다”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에 대한 저항을 시작하고 김산도 여기에 참가한다. 그리고 1921년 12월 10일, 중국 공산당 광둥성 위원회는 봉기를 일으켜 시가지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하면 적을 때려 부술 수 있겠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뿐” 자신들의 죽음과 앞으로의 운명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할 틈이 없었다. 광둥 코뮌에 참가한 조선인 양달부의 말처럼 그들은 “앞으로 전진 할 줄만 알지 후퇴하여 자신을 보존하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사흘뒤 국민당군의 공세가 시작되고 7천명의 중국인들과 함께 너무나 열정적이었던 300명의 조선인 혁명가들은 “물속의 소금처럼” 사라지고 만다.
광둥을 빠져나온 김산은 오성륜과 함께 25일 가량을 걸어 팽배가 이끄는 해륙풍 소비에트로 피신한다. 해륙풍 소비에트의 농민들은 곧 시작된 국민당군의 공격에 용감히 저항하지만 얼마못가 무너지고 김산은 몇안되는 동지들과 퇴각하였다. 적의 추격을 피하며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을 느끼고 서로 죽었을 때 가족들에게 무슨 말을 전해줄지 이야기하며 유서를 교환한다. 김산은 유서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이곳에서 행복하게 죽어갑니다. 노예의 땅에서 죽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여기가 우리의 빛나는 혁명투쟁과 같이 그렇게 자유로운 조선땅이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죽음의 위기를 헤치며 김산은 겨우 목숨을 건져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헤어졌던 김충창, 오성륜과 재회한 후 중국공산당 한인지부에서 정치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아직도 끝난게 아니었다.
1930년 마침내 김산은 국민당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경찰에게 넘겨지고 만다. 김산 스스로 말한 “아리랑 고개를 넘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일본경찰은 지독한 고문을 가하지만 김산은 자신이 공산당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였고 결국 혐의점을 찾지 못한 일본 경찰은 그를 석방하였다.
그러나 자유를 다시 찾은 김산을 기다린건 같은 조선인 혁명가와의 고통스러운 갈등이었다. 조선공산당의 핵심간부였던 한위건은 1928년 당이 일제에 의해 붕괴될 때 탈출하여 중국에 왔었다. 원래부터 단호한 성격인데다 광둥에서부터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며 동지들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된 김산은 당의 붕괴에 한위건의 책임을 물으며 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로 인해 한위건과 김산은 대립하게 되고 한위건은 일제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김산을 스파이로 지목하고 나선 것이다.
당에서의 사정회를 통해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하였지만 김산은 이 사건을 계기로 깊은 내면적 상처를 입게 된다. 같은 조선인 혁명가들끼리 서로 의심하고 대립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현실-사실 한위건 역시 뛰어난 혁명가로 중국 혁명에 참여한 조선인들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에 비애를 느꼈고 동시에 자신이 의심받았을 때 중국인 동료들의 자신에 대한 배타적인 반응을 경험하며 결국 타국 땅의 이방인으로 취급받는 설움을 온몸으로 느낀 것이다.
이런 극심한 내면적 고통을 이겨내며 김산은 마침내 한 단계 더 도약한다. 더 이상 설익은 무정부주의자도 아니고 혁명적 낭만주의에 빠진 이도 아닌 완성된 혁명가로 성장한 것이다.
엔안에서 님 웨일스를 만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 때 김산은 정치투쟁에서 손을 때고 만주 땅으로 달려가 친구인 오성륜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의 무장 투쟁에 동참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1938년 님 웨일스와 헤어지고 얼마 후 김산은 죽는다. 일제도 국민당도 아닌 바로 중국공산당 사회부장 캉성(뒷날 문화대혁명에 앞장선 인물로 마오쩌둥 전기를 쓴 로스 테릴은 그를 “추잡한 책략으로 마오의 신임을 받은 자들의 우두머리”라고 평하였다)에 의해 일제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한 것이다.
자신의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고,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지만 단 하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승리하였다고 말하던 김산.
민중과의 계급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던 김산.
자유를 위하여 자기들이 믿고 있는 것을 위하여 싸우다가 의식적으로 죽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고 말하던 김산.
중국 혁명을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이 사랑했으며 아직 어리고 불확실한 어린아이와도 같은 조선 혁명을 사랑했던 국제주의자 김산.
그리고 누구보다도 민족의 해방을 갈망하던 민족적 혁명가 김산.
오직 빛나는 승리의 기록만이 없을 뿐이지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투쟁은 어느 이름난 혁명가들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갖지 못한 것을 김산은 가지고 있다. 바로 이 땅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였다는 사실.
김산의 뜨거운 삶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것을 기록한 님 웨일스가 있어기에 나에게 영원한 혁명가의 초상은 체 게바라도 마오쩌둥도 호치민도 아닌 바로 조선인 김산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지난 반세기동안 이땅의 지배세력과 이념을 달리한다는 이유만으로 역사의 그늘에 묻혀졌던 김산과 같은 수많은 혁명가들과 항일투사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삶과 투쟁을 되살려야 한다. 청산리 전투뿐만이 아닌 일본군 74연대에게 승리를 거둔 김일성의 간삼봉 전투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며 한인애국단의 투쟁뿐만 아니라 일제를 상대로 300여차례의 테러를 감행한 의열단의 투쟁도 젊은 세대들이 알게 해야 한다. 자신의 님 웨일스를 만나지 못한 채 타국에서 조국 해방을 그리다 쓰러져 간 이름없는 이들에게 역사의 자리를 되찾아 주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희생 끝에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자들의 도리인 것이다.
<아리랑>을 통해 지난 시대 조선인 혁명가들의 삶과 투쟁, 그리고 죽음을 접하는 동안 이 책의 주인공들은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님 웨일스가 물었다.
“이 시대를 뜨겁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너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김산이 물었다.
“불의한 시대를 살아가며 너는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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