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6.08.24 18:59 수정 : 2006.08.25 14:49

그들은 왜 오늘도 산과 싸우는가
존 크라카우어 지음. 하호성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1만2000원

“위험한 등반은 사람을 중독시킨다”
말만 들어도 가슴 두근거리는 아이거·에베레스트 이야기
과거 한가닥 하다가 어느새 52살 ‘늙은이’로 전락해버린
‘산꾼’의 입담 통해 그려지는 아찔한 암벽등반의 세계

<그들은 왜 오늘도 산과 싸우는가>(자음과모음)는 산에 미친 사람들 이야기다. 원제목은 ‘아이거 드림’.

이 책은 두 가지 장점이 있다. 무언가 한 가지에 몰두하는 사람들 이야기라는 점이 첫째. 산에 대한 몰입 자체가 재미있거니와 부챗살 산자락을 타고 다양하게 펼쳐지는 모험담들이 아름다운 변주곡으로 들린다. 두번째 장점은 지은이가 산꾼이라 테마와 완전히 짝자꿍을 이룬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산에 미쳤던 쉰두 살 사내 존 크라카우어. 여덟살 생일선물로 받은 아이스툴이 인연이 되어 산에 입문한 그는 스무 살에 알래스카 ‘제너두’를 초등하고 대학졸업 뒤 역시 알래스카의 1830미터 높이의 화강암 침봉 ‘데블스 썸’(악마의 엄지)을 혼자 올랐다. 그의 삶은 등반이 중심이었다. 떠돌이 목수, 어부라는 직업은 다음 원정 자금을 모으기 위한 방편일 따름. 그의 등산편력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질척질척한 건설 현장에서 처량하게 비를 맞아가며 톱질을 하던 어느 날 문득 가정을 이뤄 부동산에 투자하거나 잔디깎기 기구를 사들이거나 부지런히 재산을 모으는 대학 동창생들이 떠올랐고 그럴수록 비참해져 등반생활을 중단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는 더 이상 암벽 피치마다 목숨이 붙어있음을 감사드리거나 더 어렵고 위험한 곳을 찾아다니지 않게 되었다. 이를 두고 “일주일 내내 위스키 병을 입에 달고 살던 알코올 중독자가 토요일 저녁 시원한 맥주 한잔만을 들이키는 평범한 사람으로 바뀐 것”이라고 했다. 등반가로서의 그의 야망은 글쓰는 일에 고스란히 투자돼 81년부터 전국규모 잡지에 잡다한 글을 쓰는 글쟁이로 살고 있다. 지은이는 말하자면 거석 숭배자 집단에서 탈퇴한 신도, 한번 맛 들이면 헤어나오기 힘든 마약을 끊은 중독자. 산 이야기에 맞춤하다. 신도나 중독자한테 산 자체가 아닌 산에 관한 글쓰기는 시큰둥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서른이면 환갑이라는 바위꾼 세계에서 쉰두 살의 그는 끈 떨어진 뒤웅박. 자기의 옛 터전인 산 주변을 얼찐거리면서 현역 산꾼들한테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이야기를 주워모아 화려했던 자신의 추억을 버무려 글을 엮는 모습이 아련하다. 어쩌겠는가. 산은, 험준한 고개와 깎아지른 암벽은, 더 이상 늙은 사내가 붙기에는 버거운 것을. 나이뿐 아니라 끈끈한 가족은 그를 더 이상 절벽 너머로 놓아주지 않을 터이다.

“나는 산에서 가장 행복했다”

암벽등반은 흔히 마약에 비유한다. 한번 맛들이면 헤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히말라야는 암벽등반에다 트레킹, 빙벽등반이 고루 섞인 종합 선물세트. 한발 너머 죽음과 동행하는 등반은 고행이자 수행에 속한다. 사진은 로체 남벽 비탈에 새집처럼 설치한 중간캠프. <2004 한국로체원정보고서>에서
그래도 추억은 날카로운 첫 키스처럼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아니겠는가. “까마득한 아래에서 산을 둘러싸고 있던 침봉들과 바위벽들이 마치 북극 여름의 기분 나쁜 백야의 땅거미 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처럼 주홍색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모진 바람이 뷰포트 해로부터 불어와 광활한 툰드라 지대를 가로지르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고 내 두 손은 추위에 얼어붙은 탓에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내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다.”

나이듦은 8살 후배 마크와의 아이거 북벽 등반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후배는 북벽을 몹시 등반하고 싶어하는데 비해 자신은 그곳을 등반했기를 바라고 있었다. ‘죽음의 비박’을 눈앞에 두고 등반을 포기한 채 하강했을 때의 두 표정. 자신은 살아서 내려온 것에 감격해 눈위에 털썩 주저앉아 껄껄 웃었고 후배는 몇 백미터 떨어진 바위에서 울고 있었다! 샤모니의 까마귀클럽에서의 일도 격세지감. 패트릭이라는 젊은이한테 그랑 카퓌생 등반을 자랑스럽게 늘어놨다가 “단독등반도 하지 않았고 패러글라이더 활강도 하지 않았다구요?” 라는 반문에 머쓱해 했던 경험도 털어놨다. 언뜻언뜻 보이는 경험담이 참 솔직하다.


아이거, 샤모니, 에베레스트, K2…. 말만으로도 가슴 두근거리는 곳, 하지만 쉽게 갈 수 없는 그곳의 이야기를 한가닥 했던 산꾼의 입담을 통해 듣기는 행복하다. 북한산 인수봉 아래 텐트 밖에서 밤 공기 너머 들려오는 이야기처럼이나.

행인의 절반이 잘 사린 8.8밀리 로프 한동을 어깨에 걸치고 등산화를 신은 채 뚜벅뚜벅 걸어다닌다는 샤모니. 그곳 경찰 특수산악구조대에 근무하는 서른 살 젊은이, 1966년 쁘띠 드류 서벽에서 조난당한 2명의 독일인 구출 일화, 일련의 대담하고 눈부신 등반으로 그곳 소녀와 결혼해 폐쇄적인 그곳 사회에 진입한 미국 등반가, 그곳 호텔에서는 주사가 심한 스웨덴 사람을 사절한다는 얘기, 방귀뀌는 이탈리아인, 정장과 드레스 차림의 일본인 등 케이블카 풍경…. 현장에 가보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귀에 착 감기는 얘기들이다.

세계 제4위의 히말라야 로체봉(8516)에 이르기 위한 긴 카라반 길에서 마주치는 아마다블람봉(6812미터). <2004 한국로체원정보고서>에서
화이트아웃 상태에서 1분 단위로 세 차례 방향을 틀어 정확한 착륙지점을 찾아 등반가를 구조한 알래스카 탈키트나의 조종사들 이야기나 전세계를 떠돌며 술을 퍼마시고 싸움질을 일삼은 등반계의 악동 버제스 형제, 바위 표면에 드러난 홀드를 이리저리 조합함으로써 볼더링을 예술로 승화시킨 수학자 존 길, 연 매출액이 700억원을 넘는 장비회사를 운영하는 이본 취나드가 젊어서는 고양이 사료로 끼니를 잇는 떠돌이 장사꾼이었다는 등의 산사람 이야기는 물론 전인미답의 애리조나주 협곡 트레킹, 알래스카 발디스 빙벽 이야기는 궁둥이 끝동을 간질인다.

‘산사람들 이야기’ 궁둥이 간질여

“위험함은 사람을 중독시키는 것 같아요. 줄을 묶지 않고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 등반할 때 팔다리는 가벼워졌고 호흡도 매우 미묘한 변화를 보였습니다. 몸이 생리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상태에 이르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강렬한 열정이 마구 샘솟습니다.” 지은이는 존 길의 입을 빌어 ‘그들은 왜 산과 싸우는가’라는 물음의 답을 한다.

바람이나 눈비로 비좁은 텐트에서 일주일 이상 죽쳐야 할 때 동료의 손가락 관절꺾는 소리나 코후비기, 코골기 등 하찮은 일로 다투고 축축한 발이 자기 자리로 넘어왔다고 주먹질을 할 정도로 짜증을 내지는 않았는가. 또 라면봉투에 적힌 조리방법이나 의약품의 긴 사용설명서를 반복해 읽거나 텐트 천장의 가는 선을 하나하나 세면서 시간을 죽인 기억은 없는가? 구절구절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도 자기 몸으로 때우는 산행만 하겠는가.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ㅏ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