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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04 16:32 수정 : 2005.03.04 16:32

3월의 강단만큼 가슴 설레는 곳이 또 있을까. 신입생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앞에 서보시라. 그 누가 철학자로 되지 않고 배길 수 있으랴. 어찌 시인의 몸짓, 예언자의 목소리를 흉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철학자의 목소리는 어떠하오. 길 잃은 내 벗이여 어린 동지여, 먼저 그대에게 권리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마. 권리란 새삼 무엇이뇨. 의무 다음에 오는 것이라네. 의무란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 행하지 않으면 강제 당하는 것, 그래서 운명적으로 주어진 짐이라네. 그대에게 또 그 누구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그 의무란 새삼 무엇인가. 혼자 있음(고독)이 그것. 왜냐면 그대는 이 지상 허허벌판에 던져진 존재(被投性)이니까. 혼자 있음이기에 불안할 수밖에. 혼자 있음이기에 불안할 뿐 아니라 무서울 수밖에. 혼자 불안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존재, 이것이 그대의 모습이라네. 절대로 벗어날 수 없기에 의무인 까닭. 이런 의무를 수행한 자만이 한 가지 권리를 갖는다네. 그 권리의 다른 이름이 바로 자유라네. 불안과 공포 속에서 혼자 살아갈 때 비로소 얻어지는 자유란 또 무엇인가. 자기가 자기를 만들어가기(企圖性)라네. 그 누가 대통령으로, 장군으로, 상인으로 태어날 수 있으랴. 한 아기가 태어났을 뿐. 그가 장군으로, 과학자로 된 것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간 것일 뿐. 그것은 저 권리 인식의 강도에 비례하는 것. 또 그것은 저 의무 수행의 강도에 비례하는 것. 가장 철저히 불안 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혼자 있어본 자, 그만이 철저히 자유를 자기 것으로 했을 터이니까.

철학자의 외침이 다한 자리, 이번엔 시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오. 방황하는 젊은 벗이여, 청청한 호수여, 새벽의 황야여, 나타나엘이여, 지금부터 당장 그대는 길을 떠나라. 네 집에서 거리에서 학교에서 뒤돌아봄 없이 떠나라. 망설임도 없이 책을 버려라. 그대를 닮은 그 어떤 것에서도 철저히 도망쳐야 한다. 내가 만들어준 잠자리에 어찌 감히 그대가 잘 수 있으며 목마른 그대에게 물을 떠준다면 어찌 마실 수 있겠는가. 자, 내 아기야 이젠 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설사 내가 아홉 개의 교향곡을 짓고 최후의 만찬을 그렸더라도 너는 이제 나를 비웃을 권리가 있다.

건방진 철학자의 권유, 경박스런 시인의 감언이설에 길을 떠난 그대 나타나엘은 어떻게 되었을까. 참으로 궁금할 수밖에요. 세상은 넓고 험난하며 예기치 못한 사태들이 유령처럼 출몰하는 장소이니까. 필시 그대는 가시나무에 살갗이 터졌고, 해어진 신발에 발바닥도 갈라졌고, 사랑의 배신에 골이 빌 만큼 가난해졌을 터. 이 모두가 그 누구의 잘잘못과 무관하다는 것도 그대는 알아차렸을 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그대가 돌아옴을 멀리서부터 대번에 알아차린 철학자, 시인이 맨발로 달려가 그대를 껴안으며, 아, 내 아들아 얼마나 고생했는가, 죽었다 살아온 내 아들아, 라고 외쳤소.

그대는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다만 묵묵했을 뿐. 어떤 표정도 몸짓도 보이지 않았소. 일단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을 뿐. 그는 말을 잃었소. 누가 이 아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 시인으로서는, 철학자로서는 더 이상 관여할 수 없는 장소, 거기에 그대가 와 있기 때문이오.

시인, 철학자가 미치지 못하는 곳, 거기에서 비로소 예언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오. 경박한 시인이여, 주제넘은 철학자여, 그 아들을 그냥 두라. 그 아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말라, 라고. 어째서? 그 아들은 이미 그대의 아들이 아니니까. 그 아들은 ‘아들’이 아니라 한 고유한 단독자니까. 아무리 가까운 육친이라도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것.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법. 그렇지 않고 계속 그 아들을 사랑해보아라. 그 아들은 필시 또 가출할 것이니까. 그 아들은 숨이 막혀 더 이상 아비의 집에 머물지 못할 터이니까.

3월 강단을 가득 메운 철학자, 시인, 예언자, 그들은 대체 누구일까. 철학자의 이름은 사르트르. 그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라고 갈파했소. 시인의 이름은 지드. <지상의 양식>(1897)에서 외쳤소. 그렇다면 예언자는 누구였던가. ‘탕아의 귀가’(루가 제15장 11~32절)로 결말을 삼은 <말테의 수기>(1910)의 릴케가 그오. 3월의 강단만큼 가슴 설레는 곳이 따로 있을까. 없소. 출발의 형식과 귀환의 형식이 동시에 있기에.

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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