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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11 16:45 수정 : 2005.03.11 16:45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

/ 아자르 나피시

아자르 나피시의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한숲 펴냄)를 예비 독서목록에서 불러낸 건 타리크 알리의 〈근본주의의 충돌〉(미토 펴냄)이었다. 나피시의 책은 알리가 일깨운 몇 개의 교훈 가운데 하나를 검증하기 위해 호출되었다.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보루라고 해서 이슬람 신정국가의 야만성을 용인해선 안 된다, 는.

이란 태생 영문학자의 회고록에서 은근히 역설적인 ‘균형 감각’을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나피시의 책은 알리의 교훈을 확인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한 걸음 나아가 근본주의를 보는 어정쩡한 태도에 확신마저 심어 주었다. 종교나 이념, 어떤 외피를 둘렀든 모든 근본주의는 아주 나쁘다. 이것만으로도 중앙 아시아의 이웃한 나라 출신 영어권 작가의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나, 두 권은 아낌없는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이들은 읽기 전에는 그 진가를 알기 어려운 부류에 속한다. 아울러 읽는 동안 좋은 책이 주는 행복감도 한껏 누리게 한다.

그렇다고 여자 영문학 교수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서 겪은 18년간의 삶에 처음부터 몰입한 건 아니다. 완독을 자신하지 못할 정도로 1부를 읽는 내내 마음이 몹시 편치 않았다. 이건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물론 완벽하게 닮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그들이 우리보고 미국 성조기를 발로 짓밟으면서 미국 죽어라 하고 소리치라고 강요했을 때 그 아이 심정이 어땠겠어요?” 얼마 전까지 우리는 그럴 자유가 없었고, 이제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미국 만세’와 ‘미 대통령 만수무강’을 외치는 자유가 당혹스럽다. 그래서일까. 1부에 흐르는 자유에 대한 강박적 묘사가 시종 무겁게 다가온 것은.

지나고 보니 1부에 드리운 친 ‘서구적’·친미적 색채는 일종의 진입장벽이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감정이입을 방해한 걸림돌은 하나둘 치워졌는데,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제인 오스틴을 비난하기 위해 에드워드 사이드를 인용한 것에 놓은 일침이 대표적이다. “이란의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 서구에서 혁명적이라고 간주되는 사람들의 작품이나 이론들과 동일시하고 그것을 선취하려드는 꼴도 역시 아이러니였다.” 게다가 나피시는 맹목적인 서구 추종자가 아니다. “우리 학생들은 서구를 너무나 무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어요. 이슬람 공화국 덕분에 그들은 서구에 대해서 장밋빛 그림을 지니고 있어요.”

‘악의 축’이니, ‘폭정의 전초기지’니 하는 제국주의자의 일방적 매도와는 별개로 이 책은 신정국가의 폭압정치에 관용과 아량을 베풀어선 안 된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솔직히 이슬람 공화국의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 줄은 미처 몰랐다. “미트라가 받은 가장 큰 충격은 다마스커스 거리에서 받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티셔츠와 진 바지를 입고서 하미드와 손을 맞잡고 거리를 자유롭게 걸어갔다.” 이로써 자유를 향한 강박증도 이해되었다. 그리고 성 관념의 이중 잣대, 병역 기피, 미 영주권의 소지 따위는 어디서 많이 봤던 권력의 속성이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타미 대통령에게 품었던 ‘개혁파’의 환상을 깬다.


“롤리타는 정말로 갈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는 나보코프 소설의 일절은 나피시 회고록의 화두 중 하나다. 그럼 이슬람이라는 “절대적인 피난처”에 몸을 맡기기도, 이상향을 찾아 나라를 떠나는 것도 불가능한 갈 곳 없는 롤리타는 어쩌란 말인가. 나피시의 “진정한 민주주의”와 알리의 “철저한 혁명”이 바람직한 대안일 수 있다. 그런데 그걸 누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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