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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진중권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글쓴이가 너무 명민하면 책 읽는 재미가 반감되고 만다. 진중권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 그런 경우다. 책을 읽어나가다, 앞에 나온 대목이 겹쳐 나오는 것을 눈치챘다. 처음에는 실수인가했다가 거듭되자 무릎을 쳤다. 지은이가 지금 새로운 글쓰기 실험을 하고 있구나 싶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하이퍼링크식 글쓰기라 할만한데, 책이라는 오래된 매체가 강요하는 형식에서 벗어나 인터넷 매체의 특징을 살려 글을 쓰고 있었다. 글쓴이의 숨은 의도를 읽어냈다며 좋아했는데, 책 말미에 이르니 아뿔싸, 지은이가 이 사실을 밝혀놓았다. 크로스워드 퍼즐을 닮은 비선형적 텍스트로, 미래의 글쓰기 형태가 될 거란다. 책읽는 즐거움을 ‘강탈’당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나는 이 책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일찌감치 실토한 셈이 되고 말았다. 글쓴이가 명민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한 상찬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그것이 새로운 글쓰기를 실험했다는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 실험이 과연 성공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나는 이른바 비선형적 글쓰기가 안고 있는 한계도 이 책에서 확인했다. (설혹, 의도한 바라 하더라도) 흩어지기만 했지 모이지 않아서 정리되지 않는 측면도 있었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놀이와 예술의 연관성을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득력 있게 설명한 데 있다. 과거에 상상은 한낱 허구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상력은 테크놀러지의 뒷받침을 받아 현실이 되고 있다. 오죽하면 상상력이 생산력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하겠는가. 그런데 익히 알다시피 상상은 놀이이고, 놀이는 어린아이의 세계이다. 결론격으로 “창조적 인간이 되고 싶은가? 그럼 성숙의 지혜를 가지고 어린 시절의 천진함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책을 장식하고 있는 사례들은, 근대의 입장에서 보자면, 억압된 예술갈래들이다. 포스트모던한 오늘에 이르러 이 갈래들은 ‘귀환’하고 있으며 그 가치를 재평가받고 있다. 왜상(anamorphosis)과 수수께끼 그림(rebus)이 대표적인 예가 될 성싶다. 진중권은 새로운 시대를 이해하는 열쇳말로 비선형, 순환성, 파편성, 중의성, 동감각, 형상문자, 단자론을 들고 있다. 일곱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책의 내용도 여기에 대응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미학이라는 프리즘으로 본 포스트모던 입문서 역할도 해내고 있다. 흔히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당연히 단순반복일 리는 없고, 구조적 동일성을 일컫는다. 중세인가 포스트모던인가라는 에코의 질문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을 터다. 중세와 탈근대의 유사성에 착안한 것이다. 그런데 진중권은 에코를 넘어서고자 한다. 중세의 상상력이 지극히 주술적-신학적이었다는 점에서 오늘의 상상력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오히려 과학적-환상적 상상력을 특징으로 한 마니에리스모-바로크 시대를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못내 아쉬운 것도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이 시대는 불가피한 것이고 넘어서기 어렵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측면이 있어서다. ‘어린이-되기’가 해결책으로 제시되어 있지만, 파괴력은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탈근대적 미로가 상징하는 ‘영겁회귀’보다는 ‘탈주’가 더 강조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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